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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지진구(地鎭具)와 도자기 [심지연]
등록일
2010-03-29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036


최근 세계 여기저기에서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우려의 소식들이 들리고 있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자연재해인 지진은 현재 진형형으로 건물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자연재해에 대한 예측이 힘들었던 옛날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피하려고 했을까?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券)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지신(地神)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사들이거나 신의 보호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토착신앙과 도교의 지신(地神)이라는 개념위에 불교적인 의례가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나 탑, 무덤 등의 건축물을 세울 때 건물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건물의 주변이나 내부에 공양품으로써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용기에 담아 땅에 묻기도 하였다. 이러한 물품들은 진단구(鎭壇具) 또는 지진구(地鎭具)라고 하는데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할 때 불이나 큰 재앙을 막고자 하는 벽사(?邪)와 기원(祈願)의 뜻을 담아 땅 속에 묻는 물건을 말한다. 주로 옥, 유리구슬과 같은 장신구나, 금속제품, 크기가 다양한 각종 용기류 등이 사용되었고 7세기 후반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권역 내의 황룡사지, 구황동 원지, 전 인용사지 등 주요 절터나 건물지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건물지의 기단 주변이나 기단토 내부에 매납되는 지진구는 대부분이 똑바로 세워진 상태에서 묻혀진 것으로 보아 용기(用器)의 내부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지진구 용기 내부에 담겨진 공양물의 종류는 유리구슬, 동물뼈, 벼와 견과류, 동전, 철도자, 황칠 등으로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으나 대부분의 지진구의 속은 비어있는 상태로 출토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지진구로는 첨성대와 계림(鷄林)의 사이, 즉 월성의 북서편에 위치한 대형의 건물지에서는 5개의 지진구(地鎭具)를 갖춘 담장 형태의 석열유구가 조사되었다.[사진1]
 


                                    
사진 1. 경주 황남동유적 출토 지진구
                      (『발굴에서 전시까지』, 2007,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이곳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월성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성 주변의 방어용 해자(垓字)를 매우고 대형 건물지 및 관청거리를 조성했다는 것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그리고 지진구 이외의 출토유물로 금빛을 내는 도료로 알려진 황칠(黃漆)이 인화문 합 속에 담긴 채 처음으로 발견되었다.[사진2] 황칠은 황칠나무의 수액으로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금칠 또는 황칠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남해안 일부와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한국 고유의 특산종으로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해상왕 장보고의 교역상품 중 최상품이 황칠액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귀한 물품이었던 황칠을 합에 넣어 매납한 것으로 보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매납된 듯 하다.


                    
사진 2. 황남동 유적출토 황칠이 담긴 도장무늬 합과 황칠세부

                       (『발굴에서 전시까지』, 2007,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기가 되면 지진구의 기형이 합이 주류를 이루던 것에서 점차 크기가 커져 장동호 또는 단경호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전시기에 비해 용기의 매납이 줄어드는 대신 사찰 건물에 있어서 향완, 정병, 소형 종(鐘)과 반자 등 불교와 관련된 용품이 많아지고 용기의 조합도 도기질(陶器質)의 병이나 호에 뚜껑으로 청자대접이나 접시 등이 이용된다.

 [사진3]은 김해의 지역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건물지로 기단부와 건물지 내부에 원형의 구덩이를 판 후 음각의 앵무문과 철화가 장식된 청자를 매납하였다. 이 지진구들은 건물 축조시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부의 모서리에 세워진 상태로 매납된 도기병에는 청자대접이 뚜껑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3. 고려시대 건물지에 매납된 지진구

                         (『김해 봉황동 유적 -도판-』, 2007, 경남고고학연구소)

  이외에도 고려시대 왕릉급 고분으로 알려졌던 능내리 석실분에서는 무덤의 기단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지진구로 매납된 도기호가 각각 1점씩 모두 4점이 있다. 고려시대의 지진구는 일반 건물지 이외에 무덤에도 매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진4]
 


                              
사진 4. 강화 능내리 석실 기단부 출토 지진구

                              (『江華 高麗王陵』, 2007,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에는 이전시기인 고려시대보다 매납되는 지진구의 수가 더욱 축소되며 용기의 종류와 크기에 있어서도 접시나 대접, 병, 호로 한정되는 동시에 크기가 작아진다. 용기의 내부에는 구슬이나 동물뼈가 담겨지던 이전시기와 달리 수은과 점토를 혼합하여 채워 넣는 예도 있다. 이 외에도 사찰이나 주요 건물지 이외에 경기도 광주의 송정동의 17세기 중반의 백자가마터에서는 지진구가 출토되었다. 이 지진구는 백자 호에 백자접시로 뚜껑을 대신한 형태이다.[사진5]



                                 사진 5. 광주 송정동 5호 백자가마와 지진구
                     (『경기도 광주 관요 종합분석 보고서』, 2008, 경기도 박물관)

건물지가 아닌 가마터에서 이러한 지진구를 매납한 이유로는 백자를 구워내는 가마의 생산품들이 큰 실패 없이 원활하게 제작되기를 기원한 것이 아닐까 한다.

 건물지에서 확인되는 지진구로 사용된 도자기는 그 건물지의 성격과 연대를 파악을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동시에 당시의 도자기 문화의 유형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심지연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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