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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명성황후 이야기 2]
등록일
2011-12-12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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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ㄹ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강행한 서원철폐는 분서갱유를 지시한 진시황을 떠올리게 했다. 집권 초기의 개혁정치로 국방력은 강해졌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쇄국정책은 전쟁을 불러왔고 서구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는 놓쳐버렸다.

 

 

 

섭정이 끝난 후에도 정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에 연루되기도 했다. 임오군란 때는 궁에 난입한 군인들을 피해 피신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중국 천진(天津)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세력에 손을 뻗었으며, 갑오경장(갑오개혁) 때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친러정부가 들어서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1898년 1월 부인의 죽음을 본 다음 달에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에서 생을 마감하고 뒤뜰에 묻혔다. 한성부(漢城府)에서 7일장을 치렀으나 고종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도피와 은거,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며 폐위되기까지 명성황후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살았다.『 조선견문록』을 기록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호톤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국익을 위해 헌신하며 국민의 복지를 생각하는 여인으로 외국의 궁전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조선 사람이었으나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기억했다. 또한 '세계 강대국과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섬세한 감각의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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