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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⑭ ]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의 전당
등록일
2008-07-07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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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효목동 조양회관



1.등록번호 : 제4호(2002년 2월 28일 등록)

2.소 유 자 : 대구광역시장

3.설계자 : 윤학기

4.건립연도 : 1922년 10월 30일

5.면적 : 연면적/837㎡

6.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산 234-33번지(망우공원 내)

7.현용도 : 광복회 사무실

8.구조 : 적벽돌 조적조(지상 2층)

9. 참고문헌 : 대구지역근대건축물조사보고서(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1988)

대구시사 제4권(사회편, 대구시,1995)



조양회관은 붉은벽돌조 2층 건물로, 대구의 서상일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민중과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1922년 4월 1일에 착공하여 그해 10월에 준공한 건물이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문화정책으로 전환하자 서상일 등 당시 대구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혼을 불어넣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당시의 대구시 대신동 5의 2번지의 달성공원 앞 5백평 대지에 43,080원 50전을 들여 이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 건물을 짓는데 백두산에서 가져온 낙엽송과 백남채 공장에서 만든 붉은벽돌이 사용되었다. 조양회관은 당시 대구의 건축가 윤학기가 설계하고, 백남채가 공사감독을 맡았으며, 공사에는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





1922년 10월에 완공 후 이 회관에는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족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조양회관(朝陽會館)’이란 건물 명칭에도 광복의 염원이 담겨 있는데, 아침 해를 향해 희망을 찾는 배달민족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회관 건립 7년 만에 이곳이 영남지역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목되면서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건물은 조선총독부에 징발되어 대구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일본군 보급부대가 주둔하는 등 이 건물은 민족의 수난사와 운명을 함께 해 왔다. 광복 후 잠시 한민당 등의 정당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53년에 원화여중·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이 건물을 인수하여 교무실 겸 도서관으로 사용했다. 1980년 원화여중·고의 교외(郊外) 이전 계획에 따라 그해 8월 ‘월성건설’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당시 월성건설측은 조양회관을 헐고 그 자리에 사옥을 신축할 계획이었으나 건물의 보존을 원하는 광복회와 시민들의 여론을 받아들인 대구시가 1억 7천 7백만원으로 매입, 현 위치에 이전·복원하였다.





건축양식은 정면 중앙에 현관을 돌출시킨 당시 유행하던 양풍(洋風)건축이었다. 건물의 평면은 좌우 대칭형으로, 정면 좌우 양끝의 계단실 부분이 약하게 돌출되고, 뒷면 중앙부가 뒤로 돌출해 있어 전체적으로는 십자(十字)형에 가깝다. 정면 중앙의 돌출된 현관은 4개의 사각 돌기둥을 세워 평지붕을 올린 형태이며, 돌기둥의 머리에는 주두(柱頭)를 간략히 표현하였다. 기둥 사이에는 반원형 아치를 틀어 장식했다. 돌출된 현관 상부의 지붕에는 작은 삼각형 박공을 만들어 위엄있게 구성한 현관과 함께 정면성을 강조했다. 전반적으로 1920년대 관공서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형태를 따른 건물이다.



1층 평면은 정면의 현관을 중심으로 십자형의 중복도를 내고, 복도에 면해 각 실을 배치했다. 2층에서 가장 중요한 실은 강당으로, 이는 대중 강연 등을 고려하여 설계한 것이다. 건물의 외벽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벽돌을 쌓았으며, 창문에는 오르내리기창을 시설했다. 모든 창문에는 화강석으로 다듬은 인방석(引枋石)을 연속으로 설치하여 수평성을 강조했다. 외벽에 대칭적으로 시설된 창으로 인해 외관이 엄격하고 질서 있게 느껴진다. 내부 바닥은 장마루로 되어 있으며, 건물의 내벽은 회반죽을 발라 마감했다. 지붕은 목조 왕대공 형식의 삼각형 지붕틀을 만들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덮었다. 건물 내부의 목조계단의 엄지기둥, 난간두겁 등은 간결하면서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건물은 1922년에 대구지역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민족 계몽운동의 전당으로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곳에서 애국심과 독립의식을 교육받은 많은 인재들이 성장하여 독립투사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 귀중한 건물이라 하겠다. 이러한 건물의 역사적 가치 외에 품위 있고 단아한 건축형태와 기능적인 공간구성으로 인해 1920년대의 근대건축 중의 우수한 건물로 평가받아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4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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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디자인기획에서 발간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Vol.1]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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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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