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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⑦ ] 실용적 가치에 의한 원예학,식물학의 요람
등록일
2008-05-19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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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창경궁 대온실



1.등록번호 : 제83호(2004년 2월 6일 등록)

2.소 유 자 : 문화재청장

3.설계자 :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 프랑스회사 시공

4.건립연도 : 1909년

5.면적 : 연면적/582㎡

6.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

7.현용도 : 온실

8.구조 : 주철구조+목구조(지상 1층, 높이/10.5m)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서 오른 편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서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유리온실을 만나게 된다. 이 창경궁 대온실은 창경궁이 동물원과 식물원을 갖추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1909년 11월에 건축되었다. 일제가 황제의 마음을 돌리고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킬 목적으로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유락목적의 못과 수각을 만들어 궁궐의 기능에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한일합방 직후에는 박물관이 건축되었고, 권농장터에 만든 춘당지 위에는 일본식 정자인 수정(水亭)이 건축되면서 창경궁 내의 전각 훼철이 본격화 되었다. 급기야 1911년 창경궁은 이름도 잃어버렸다. 궁(宮)에서 원(苑)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이후 창경원에는 장서각(1915)을 비롯하여, 각종 동물 우리들이 건립되었고, 곳곳에 벚꽃이 심어져 경성 제일의 위락장소로 변하였다. 이러한 창경궁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일제가 조성한 동물원과 식물원은 학생들의 소풍과 견학의 장소가 되었고, 벚꽃은 봄마다 만개하여 젊은 연인은 물론 서울시민의 위락장소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수난의 창경궁이 이름을 회복하고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시민을 맞이한 것은 1983년 동·식물원이 과천대공원으로 이전하고, 창경궁복원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이다.



20세기 초 온실건축은 기후조건이 다른 지방과 계절의 식물을 사시사철 감상하기 위한 시설물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미학적 가치보다는 실용적 가치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러한 온실 건축의 특징은 창경궁 온실에서도 가감 없이 드러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구조와 주철구조의 합성으로 건축된 유일한 유리 건축물로서 가느다랗고 하얗게 칠해진 부재로 만들어진 탓에 그리 작지 않은 건물(정면 33m, 측면 14.65m, 높이 10.5m)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외관은 유리박스에 경사지붕이 얹혀있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창호의 사라센풍 아치는 최소한의 의장으로 단순 반복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동절기 햇빛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창살의 두께를 최소화하고, 구조체를 내부화하였으며, 당대에 사용 가능한 판유리의 최대 폭을 모듈로 한 창호구성으로 경쾌한 외관이 형성되었다.



온실 내부로 들어가면, 주철제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고창에 의해 중앙부가 높은 천장이 형성되어 있다. 가늘지만 석조기둥의 세부 표현을 지닌 날렵한 주철제 기둥은 주변의 무성한 수풀에 의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부 회랑의 유리벽체에서는 각종 기계장치와 창호 그리고 벽체와 지붕구조의 섬세한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온도 조절을 위한 창호 개폐장치 뿐 아니라, 눈여겨 바라보면 각 부재의 연결 기법에서 수공업적 산업생산 시스템을 보여주는 섬세한 표현을 찾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100년 가까운 연륜에도 불구하고 반 이상의 개폐장치는 여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천장 역시 햇살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는 부재로 디자인되어 가냘프지만 아름다운 지붕구조를 만들어주고 있다. 특히, 주요 부재가 목재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창경궁 식물원 온실의 설계는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 시공은 프랑스회사에서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온실건축의 기안은 후쿠바의 것일 수 있으나, 온실의 양식이나 구법은 시공자인 프랑스 기술진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경궁 온실은 규모나 엔지니어링 미학의 수준에서는 서양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곳이 원예학과 육종학 및 식물학의 요람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더해주는 감동은 서양의 그것과 비견할 만하다.



창경궁 복원계획이 수립되어 벚꽃이 제거되고, 장서각 등 각종 양관이 철거되었으나, 온실만은 오늘에도 여전하여 대한제국 말기에 이 땅에 도입된 서양건축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3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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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디자인기획에서 발간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Vol.1]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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