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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낙선재 권역 1]
등록일
2010-09-13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7394








7. 낙선재樂善齋 권역


 







7-h-1 낙선재樂善齋

 

위치와 연혁 :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방이기도 하다. 낙선재라는 이름은 영조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나 1756(영조 32)년과 1788(정조 12)년에 발생한 화재로 타버려서 『동궐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낙선재는 1847(헌종 13)년에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왕실의 사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에는 고종이 이 곳을 집무소로 사용했다. 고종은 여기에서 대신들을 만나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하고, 일본과 청나라 등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1874~1926년)은 국권을 빼앗기고 나서 1912년 6월 14일이 곳으로 거처를 옮겨 거주하였다.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년)도 낙선재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 후 이은의 부인 이방자(李芳子,1901~1989년) 여사가 여기에서 살았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한 칸을 전면으로 돌출시켜 누마루로 삼았다. 이 일대는 본래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뜻풀이 :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맹자』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樂善不倦]을 천작(天爵)이라고 한다.”<원전 1>고 했다. 임금이 이 곳에서 인의와 충신을 지키며 선을 즐겨 하늘의 작록(爵祿) 1)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작 정보 :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 2)의 글씨이다.






7-j-1 낙선재樂善齋의 주련

 

위치와 연혁 : 낙선재의 주련은 본채의 동쪽 측면을 제외한 건물 전체에 빙 둘러 걸려 있다. 낙선재의 주련 수량은 연경당 다음으로 많다. 만든 격식이나 내용으로 보면 궁궐을 통틀어 주련 연구에 가장 중요한 곳이다.



뜻풀이 :

(1)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

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 3)라고 씌어 있고

(2)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

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 4)이라고 새겨져 있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와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한 구절이다. 와당, 즉 기와끝에는 장수하라는 뜻의 글을 써 놓았고, 동반, 즉 구리로 만든 쟁반에는 부귀와 복을 누리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이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인 ‘趙光(조광)’과 ‘蓉舫(용방)’이 사각의 음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청나라 때 문인인 조광(趙光, 1797~1865년) 5)은 시문을 잘 하였고,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 6)의 서법에 능하였다. 경복궁 함화당(咸和堂)과 창덕궁 한정당(閒靜堂)에도 각각 같은 구절이 걸려 있다.

 


뜻풀이 :

(3) 山隨水曲趣無盡(산수수곡취무진)

산이 물을 따라 굽이치니 흥취가 다함이 없고

(4) 竹與蘭期坐有情(죽여란기좌유정)

대와 난과 기약하니 자리에 정이 넘치네.

 

산이 물을 따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흥취를 누리고, 대와 난이 자라는 이 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약하고 정을 나눈다는 내용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의 자와 이름을 나타내는 ‘樹琴英和(수금영화)’와 ‘英和之印(영화지인)’이 사각 음각 도장으로, ‘煦齋(후재)’가 사각 양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영화(英和, 1771~1840년) 7)는 만주 출신의 청나라 때 문인으로 후재는 그의 호다.



 

 

뜻풀이 :

(5) 經學精硏無嗜異(경학정연무기이)

경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특이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6) 藝林博綜乃逢原(예림박종내봉원)

문예를 널리 종합하여 이에 근원을 만났도다.

 

경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의 학문을 추구할 뿐 특이한 이단의 학설을 좋아하지 않고, 육예 8)를 두루 섭렵하여 올바른 교양을 갖추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봉원(逢原)’은 ‘도의 근원을 철저하게 알아낸다’는 뜻으로 『맹자』에서 유래한 말이다.<원전 2>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인 ‘翁方綱(옹방강)’과 ‘옹방강인(翁方綱印)’이 사각 음각 도장으로, 호인 ‘담계(覃谿)’가 사각 양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청나라의 문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년) 9)은 김정희(金正喜,1786~1856년)를 비롯한 조선의 문인들과 교유를 하여 조선의 청조학(淸朝學), 즉 청대 고증학 수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뜻풀이 :

(7) 滿襟?氣春如海(만금화기춘여해)

가슴 가득 화기(和氣)이니 봄은 바다와 같고

(8) 萬頃文瀾月在天(만경문란월재천)

만 이랑에 물결 이는데 달이 하늘에 있도다.

 

화기(和氣)가 가득한 봄날의 무르익은 풍경과 수많은 이랑처럼 물결이 이는 강물에 하늘에 뜬 달이 비쳐 보이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화기는 따스하고 생기 있는 기운을 말한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을 쓴 사람의 호와 이름을 나타내는 ‘雲泉黃鑑(운천황감)’과 ‘황감(黃鑒)’이 사각 음각 도장으로, ‘운천(雲泉)’이 사각 양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황감 10)은 청나라 문인으로 옹방강에게 필법을 배웠다고 한다.

 

 

뜻풀이 :

(9) 可釣可?盤谷序(가조가경반곡서)

낚시질할 만하고 밭갈이할 만하니 반곡서(盤谷序)이고,

(10) 堪詩堪?輞川圖(감시감화망천도)

시 지을 만하고 그림 그릴 만하니 망천도(輞川圖) 11)라네.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은자의 자족적인 생활을 그린 구절이다. 탈세속의 공간에서 자족하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반곡서’는 당나라 한유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는 글)」를 가리킨다. 벗인 이원(李愿)이 반곡에 은거해 살면서 세상의 명리에 초월하여 홀로 유유자적하겠다고 말하자 한유가 이에 찬동하여 쓴 글이다.<원전 3> 위의 구절은 이 곳이 한유가 이원을 전송하며 쓴 글에 나오는 그 반곡과 같다는 말이다.

한편, 아래 구절은 시로 읊거나 그림으로 그릴만큼 이곳의 풍광이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가 그린 ‘망천도’와 같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원나라의 양공원(楊公遠)이 지은 「초하여중(初夏旅中)」 오수(五首)<원전 4>중 제 5수에 나오는 구절을 따온 것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의 이름과 도장이 새겨져 있으나, 주련이 너무 낡아 이름 부분의 ‘梁(양)’자 외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경복궁의 함화당에는 같은내용의 주련이 뒤의 구절은 분실된 채 앞 구절만 걸려 있다.

 

 

뜻풀이 :

(11) 四壁圖書供嘯傲(사벽도서공소오)

사방에 가득한 도서(圖書)는 득의만만하게 노래하게 하고

(12) 半窓風月任吟?(반창풍월임음아)

창 한켠의 풍월(風月)은 마음껏 읊조리게 하네.

 

사방에 도서가 많아 그 속에서 마음껏 책을 보고 득의만만해 한다는 것과, 창문한켠에 바람 불고 달이 떠오르면 자연의 흐름에 맞춰 시를 읊조리는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인 ‘英和(영화)’와 ‘英和之印(영화지인)’이 사각 음각 도장으로, ‘煦齋(후재)’가 사각 양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뜻풀이 :

(13) 閒眠東閣修花史(한면동각수화사)

한가로이 동각에서 잠자며 화사(花史)를 수정하고,

(14) 偶坐南池注水經(우좌남지주수경)

우연히 남지에 앉아 수경(水經) 12)에 주석을 하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를 그렸다. 동쪽 누각에서 한가로이 화사, 곧 화초에 대한 책을 다듬어 보고, 남쪽 연못에서 『수경』에 주석을 다는 은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동각(東閣)은 양(梁) 나라 때 사람인 하손(何遜, ?~518년)이 자신의 동각을 개방하고 문인(文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에서 따온 말로 여러 시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곤 했다. 이를테면 두보(杜甫, 712~770년) 13)의 시에 “동각 관아의 매화가 시흥을 일으키니,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와 흡사하네.”라는 구절이있다.<원전 5> 『추구(推句)』14)에도 “서쪽 정자에는 강 위에 달 뜨고, 동쪽 누각에는 눈 속에 매화가 피었네(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라는, 작자 미상의 구절이 실려 있다.

‘남지(南池)’는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 있는 지명으로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년)이 여기서 잔치를 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종원이 지은 「배최사군유연남지서(陪崔使君遊宴南池序)」라는 글이 있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를 나타내는 ‘鐵保(철보)’라는 글이 적혀 있고, 아래에는 ‘又字鐵卿(우자철경)’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철보(1752~1824년)는 호가 매암(梅庵) 15), 자가 야정(冶亭)으로 만주 출신의 청나라 서예가이며 당대의 명가인 유용(劉墉, 1719~1804?년), 옹방강 등과 명성이 나란하였다. 조선의 북학파 학자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와 교유하여 자주 서신을 왕래하였으며, 박제가는 연작 「회인시(懷人詩)」에서 세 차례나 그에 대해 읊었다. 경복궁 함화당에도 같은 구절이 걸려 있다.


 

 

뜻풀이 :

(15) 名紙勝於求趙璧(명지승어구조벽)

좋은 종이는 조벽(趙璧)을 구하는 것보다 낫고

(16) 異書渾似借荊州(이서혼사차형주)

기이한 서적은 형주(荊州)를 빌려온 듯하네.

 

좋은 종이와 기이한 책은 값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귀하다는 뜻이다. 조벽은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의 국보이던 둥근 옥구슬로 진(秦)나라가 이를 탐을내어 갖은 술수를 썼던 일이 있다. 조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기지를 발휘하여 되찾아 온 고사로 유명하다. 형주는 삼국 시대 촉한의 유비(劉備, 161~223년)가 손권(孫權, 182~252년)에게서 얻으려 무던히 애쓴 지역이다.

본래 이 구절은 송나라 육유(陸游, 1125~1210년) 16)의 칠언율시 「수엄술회(守嚴述?)」<원전 6> 중에서 함련, 즉 셋째와 넷째 구절을 따온 것이다. 원시에는 ‘명지(名紙)’가 ‘명주(名酒)’로, ‘승(勝)’이 ‘과(過)’로 되어 있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의 호와 이름인 ‘信芳 劉?之(신방 유환지)’라는 글씨가 있고 ‘신방(信芳)’이란 사각 양각 도장 및 ‘劉?之印(유환지인)’이란 사각 음각 도장이 새겨져 있다. 유환지(劉?之, 1762~1821년) 17)는 청나라 때 문신으로 이덕무 등이 중국에 연행(燕行)했을 당시 교유하여 조선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뜻풀이 :

(17) 閒將西蜀團?錦(한장서촉단과금)

한가로이 서촉(西蜀)의 단과금(團?錦) 18)을 가져와

(18) 因誦東坡憶雪詩(인송동파억설시)

이어서 동파(東坡: 蘇軾)의 억설시(憶雪詩)<원전 7>를 읊노라.

 

본래 이 두 구절은 각기 다른 시이다. 주련의 글씨체로 보면 닮아 있어, 주련을 만들면서 편의상 두 시에서 한 구절씩 따서 대련을 만든 듯하다. 위 구절은 송나라 육유의 칠언절구 「재중잡제(齋中雜題)」<원전 8> 중에서 제3구를 따온 것이고, 아래 구절은 송나라 때 유학자이자 시인인 왕정규(王庭珪, 1079~1171년)의 칠언고시 「차운증육재취월당설시(次韻曾育才翠?堂雪詩)」<원전 9> 중 제 5구를 따온 것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의 호와 이름인 ‘竹葉亭生 姚元之(죽엽정생요원지)’라는 글씨가 있고 ‘元之(원지)’라는 호리병 모양 양각 도장 및 ‘姚氏伯昻(요씨백앙)’이라는 사각 음각 도장이 새겨져 있다. 요원지(姚元之, 1773~1852년) 19)는 청나라 때 문인이다.

둘째 구의 ‘因(인)’자는 외관상 ‘目(목)’자처럼 보이며 1957년에 조사한 자료인 『각궁주련조서(各宮柱聯調書)』에서도 ‘目誦東坡憶雪詩’라고 하였으나, 이는‘口(구)’자 안에 ‘工(공)’자가 결합된 형태로서 ‘因’자를 예서로 쓴 것인데 수리하는 과정에서 잘못 판독하여 ‘目’자로 보이도록 고친 것이다. 다시 올바로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뜻풀이 :

(19) 太史文章臣瓚注(태사문장신찬주)

태사(太史: 司馬遷)의 문장은 신하 찬(瓚) 20)이 주석을 하였고

(20) 尙書孝友君陳篇(상서효우군진편)

상서(尙書: 書經)의 효도와 우애는 군진편(君陳篇)<원전 10>에 자세하네.

 

경사(經史)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내용이다. 한나라 때 태사(太史) 벼슬을 한 사마천(司馬遷) 21)이 지은 『사기(史記)』는 신하인 부찬(傅瓚)이 주석을 하였고,『상서』, 즉 『서경』의 「군진(君陳)」편에는 효도와 우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있다는 말이다.

서적의 내용을 시로 엮어 문장(文章)과 효우(孝友)에 대해 일깨우는 구절이다.별도의 시어를 쓰지 않고도 서적 이름이나 인명을 적절히 배열하여 대구를 만들었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인 ‘浙西韓韻海書(절서한운해서)’와‘季弼(계필)’, 판독이 안 되는 글씨가 사각 음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계필(季弼)은 한운해(韓韻海)의 자(字)로 추정되는데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뜻풀이 :

(21) 擬擬寫山經?大荒(의사산경편대황)

산경(山經)을 쓰고자하여 대황(大荒)에까지 두루 다니네.

지리책을 쓰기 위해 먼 지역까지 두루 다닌다는 말이다. 산경은 지리책이란 뜻이고 대황은 먼 변방의 매우 궁벽진 곳을 말한다.

 

제작 정보 : 본래 두 구절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왼쪽에 ‘平定張穆撰句(평정장목찬구)’라고 하여 장목(張穆, 1805~1849년) 22)이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에 ‘陽泉張穆(양천장목)’과 ‘陽州山?(양주산매)’가 사각 음각 도장으로 새겨져 있다. 장목은 청나라의 학자로 지리에 정통했다.






7-h-2 장락문長樂門


 

위치와 연혁 : 낙선재 정문이다.

 

뜻풀이 : ‘장락(長樂)’이란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한비자(韓非子)』의 「공명(功名)」 편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길이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원전 11>라고 하였고, 『논어(論語)』의「이인(里仁)」편에도 “오직 어진 사람만이 길이 즐거움에 처한다.”<원전 12>라고 하였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베풀어 길이 즐거움을 누리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제작 정보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년) 23)의 글씨이다. 창덕궁에 장락문은 연경당과 낙선재 두 곳에 있다. 중국에도 전한(前漢) 시대 서안(西安)에 장락궁이 있었다. 아울러 한나라 때는 천자의 모친을 장락궁(長樂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7-h-3 금사연지琴史硯池



 

위치와 연혁 : 낙선재 본채의 바로 뒤에 소영주라는 석물이 있는데, 그 옆에 있는 네모난 돌 연못이다. 일부 문헌에서 이를 세연지(洗硯池)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벼루처럼 네모지게 생겼으므로 벼루 연(硯)자를 쓴 것이다.

 

뜻풀이 : ‘금사연지(琴史硯池)’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역사책을 읽는 벼루 같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이 벼루같이 생긴 연못 곁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기도 하고 역사책을 보기도 한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인 듯하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년) 24)의 「추등장명부해정(秋登張明府海亭)」 시에 “나 역시 거문고와 역사책을 가지고서, 노닐면서 함께 한가함을 취하리라(予亦將琴史, 棲遲共取閑).”라고 한 용례가 보인다.



 

제작 정보 : 글씨는 전서체이다.






7-h-4 소영주小瀛洲



위치와 연혁 :
낙선재 본채의 바로 뒤에 있는 석물(石物)에 새겨진 글씨이다. 이런 유형의 석물은 일반적으로 석함(石函)이라고 부르며, 괴석(怪石)을 받치고있다 하여 괴석대(怪石臺)라고도 한다.



 

뜻풀이 : ‘소영주(小瀛洲)’는 ‘작은 영주(瀛洲)’라는 뜻이다. 영주(瀛洲)는 봉래(蓬萊), 방장(方丈)과 함께 도교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 25)의 하나인데, 영생불사하는 신선들이 거주하며 불사약이 자란다는 전설상의 공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봉래는 금강산, 방장은 지리산, 영주는 한라산이라고 일컬어 왔다.






7-h-5 운비옥립雲飛玉立



 

위치와 연혁 : 소영주 위에 괴석이 놓여 있는데, 그 괴석의 앞면에 새겨진 글이다.

 

뜻풀이 : ‘운비옥립(雲飛玉立)’은 글자대로는 ‘구름이 날고 옥이 서 있다’는 뜻이지만 비유적으로 쓰여 ‘구름처럼 날고 옥처럼 서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말은 원래 당나라 두보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시에서는 “흰 매가 날 때는 구름이 나는 것과 같고 우뚝하게 앉아 있을 때는 흰 옥이 서 있는 것 같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문헌에는 ‘雲[구름]’ 대신 ‘雪[눈]’로 되어 있는 곳도 많다.

원래 이 시는 왕감(王監)이라는 병마사가 두보에게 근처의 산에 살던 흰 매와 검은 매를 소재로 해서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하자 이에 응해서 지어 준 것이다. 두보는 두 수의 시로 각각 흰 매와 검은 매를 읊었는데 ‘운비옥립’은 흰 매를 읊은 첫 수의 맨 앞 구절 ‘雲飛玉立盡淸秋(운비옥립진청추: 맑은 가을 다하도록 구름이 나는 듯하고 옥이 서 있는 듯하다)’라는 대목에 나온다.<원전 13> 괴석에다 이 구절을 새긴 것은 돌의 모습을 매가 우뚝하게 앉아 있는 듯한 형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제작 정보 : 서체는 행초서(行草書)이다. 글씨 끝에는 낙관이 새겨져 있는데 일부가 깨어져 나가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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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록은 벼슬아치들에게 내리던 관직과 녹봉.

2) 섭지선의 자는 동경(東卿)이며 관직은 병부낭중(兵部?中)에 이르렀다. 다양한 방면에 지식이 많았으며, 특히고증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조선의 명사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3) 연년익수는 수명을 오래 늘여나감.

4) 부귀길상은 부귀와 길상, 즉 가치 있고 행운을 부르는 것.

5) 조광은 청나라 운남(雲南) 곤명(昆明) 출신으로 자는 용방(蓉舫), 호는 퇴암(退庵), 시호는 문각(文恪)이다.

6) 동기창은 명나라말의 문인, 서화가이다. 자는 현재(玄宰), 호 사백(思白)·향광(香光)·사옹(思翁). 송, 원의 문인화를 계승해 북종화보다 남종화가 뛰어나다는 화론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7) 영화의 자는 수금(樹琴)·정포(定圃), 호는 후재(煦齋). 초명은 석동(石桐)이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썼다. 유용(劉墉)의 문하에 있었으며 만년에는 구양순, 유공권체를 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8) 육예는 고대 중국 교육의 여섯 가지 과목. 3-h-4예문관 참조.

9) 옹방강의 자는 정삼(正三), 호는 담계(覃溪). 시문에 능하고, 고증, 금석(金石), 서법(書法)에 정통하였다.

10) 황감의 자는 요환(耀?), 호는 운천(雲泉)·정회(瀞懷). 전서와 예서를 좋아했고 만년에는 한대의 고질(古質)한 풍격을 얻었다고 한다.

11) ‹망천도›는 왕유가 자신의 별장이있는 망천의풍경을 그린 그림. 왕유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유유자적하였다.

12) 수경은 3세기경에 이루어진 책으로 하천의 발원지, 합류지, 입해지(入海地) 등을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북위 때의 역도원(?道元, 469~527년)이 주석을 더한『수경주(水經注)』가 유명하다.

13) 두보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율시에 뛰어났다. 지금까지도‘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꼽힌다.

14) 『추구』란 오언시(五言詩)를 대구 위주로 추려 모아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이다.

15)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는 자(字)가 매암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인 듯하다.

16) 육유는 중국 송(宋)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출신이다. 침략자인 금나라에 대한 철저한 항쟁을 주장했으며, 그것을 시로 읊은 강직한 애국 시인이었다.

17) 유환지는 산동출신으로 자는 패순(佩循), 호는 신방(信芳),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벼슬이 이부상서(吏部?書)에 이르렀다. 청렴 결백한 가문의 전통을 잘 지켜 명성이 높았다.

18) 단과금은 비단의 한 종류로, 둥근 계선을 두르고 그 안에 꽃무늬를 드문드문 수 놓은 비단을 일컫는다. 서촉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省都)로 예로부터 비단의 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19) 요원지는 자는 백앙(伯?), 호는 천청(?靑), 죽엽정생(竹葉亭生), 오불옹(五不翁)이다. 벼슬이 좌도어사(左都御史)에 이르렀다. 요내(姚?)에게 배웠고 서화에 모두 능하였다.

20) 찬의 이름은 부찬 혹은 우찬(于瓚)이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그의 주석이 많이 인용되었다.

21) 사마천은 전한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 사상가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 부친의 뒤를 이어 역사책의 전범이 된『사기』의 저술을 완성하였다.

22) 장목의 초명은 영섬(瀛暹), 자는 석주(石州), 송풍(誦風), 호는 은재(殷齋). 훈고,천문, 역산(曆算),지리에 능하였다.

23) 흥선대원군의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호는 석파(石坡). 고종의 아버지로, 아들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하여, 여러 내정 개혁을 수립하였다. 천주교 탄압, 통상 수교 거부를 고수한 인물이기도 하다.

24) 맹호연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맹호연집』 4권이 있으며, 약 200수의 시가 전한다.

25) 삼신산은 『열자(列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리 떨어져 있으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한다.

 

 

<원전 1> 『맹자』, 「고자(告子) 上」, “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원전 2> 『맹자(孟子)』, 「이루장구 상(離婁章句上)」 “孟子曰 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自得之則居之安, 居之安則資之深, 資之深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 搖處之安固, 則所藉者深?而無盡, 所藉者深, 則日用之間取之至近, 無所往而不?其所資之本也.”

<원전 3> 한유, 「송이원귀반곡서」. “釣於水鮮可食”, “盤之中, 維子之宮. 盤之土, 可以稼. 盤之泉, 可濯可沿. 盤之阻, 誰爭子所?”

<원전 4> 양공원, 「초하여중」 오수, 제 5수 “每憶吾廬隱者居 天然景物足淸娛 樹林陰?鶯求友簾幕深沈燕引雛 可釣可耕盤谷序 堪詩堪?輞川圖 何當歸去北?臥 能勝羲皇以上無.”

<원전 5> 두보, 「화배적등촉주동정 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

<원전 6> 육유, 「수엄술회」, “桐君放隱兩經秋,小院孤燈夜夜愁. 名酒過於求趙璧, 異書渾似借?州. 溪山勝處?難到, 風月佳時事不休. 安得連車載?釀, 金鞭重作浣花遊.”

<원전 7> 억설시는 소식의 시 「설후서북대벽(雪後書北臺壁)」 이수(二首)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시의 2수에서 “城頭初日始?鴉, 陌上晴泥已沒車, 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眼生花,遺蝗入地應千尺, 宿麥連雲有幾家, 老病自嗟詩力退, 空吟?柱憶劉叉.”라고 하였다.

<원전 8> 육유, 「재중잡제」, “列屋娥眉不足誇,可齋?自是生涯. 閒將西蜀團?錦, 自背南唐落墨花.”

<원전 9> 왕정규, 「차운증육재취월당설시」, “?君翠?堂中雪, 詞如?戟相磨切. 又如牛鐸應?鍾, 水中躍出?賓鐵. 因誦東坡憶雪詩, 城郭山川兩奇絶. 翠?堂中雪復然, 敢擬片詞增竄竊. 長安道上醉騎驢, 忍凍不知蹄屢蹶. 爭似淮西破賊時,蔡州城外沙如月. 將軍一箭射?槍, 夜落城頭曉方滅. 書飛奏不動塵, 露布馳來迷?闕. 醉翁句律號令嚴, 凍口何由更開說. 銀杯任逐馬蹄?, 斷藁殘編且??.”

<원전 10> 『서경』의 「군진」편 첫머리에는 군진에게 효도와 우애로부터 출발하여 정치로 넓혀가라고 당부하는 내용이 있다. “王若曰 君陳,惟爾令德, 孝恭, 惟孝, 友于兄弟, 克施有政, 命汝, 尹?東郊, 敬哉.”

<원전 11> 『한비자』 「공명」, “以尊主御忠臣, 則長樂生而功名成”

<원전 12> 『논어』, 「이인」, “子曰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원전 13> 두보, 『견왕감병마사설, 근산유백흑이응, 나자구취, 경미능득, 왕이위모골유이타응, 공납후춘생, 건비피난, 경핵사추지심, 묘불가견, 청여부시(見王監兵馬使, 說近山有白黑二鷹, 羅者久取, 竟未能得. 王以爲毛骨有異他鷹,恐臘後春生, 騫飛避暖, 勁?思秋之甚, ?不可見, 請余賦詩)』, (제 1수) “雲飛玉立盡淸秋, 不惜奇毛恣遠遊, 在野只敎心力破, 于人何事網羅求, 一生自獵知無敵, 百中爭能恥下?, 鵬?九天須却避, 兎經三窟莫深憂.” (제 2수) “黑鷹不省人間有, 度海疑從北極來, 正??風超紫塞, 玄冬幾夜宿陽臺, 虞羅自覺虛施巧, 春雁同歸必見猜,萬里寒空只一日, 金眸玉爪不凡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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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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