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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조선왕릉의 비밀 ⑤ - 정릉]
등록일
2009-07-27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388





                         사적 제 208 호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87-16

           
정릉 가는 길 :
내부순환도로(또는 북악터널) → 정릉(램프) → 정릉삼거리(우회전) → 아리랑고개방향 진입 후 우회전(이정표)




                                      < 정릉 | 貞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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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계비인 신덕왕후는 본래 도성 안에 묻혔으나 태종에 의해 도성 밖인 현 자리로 이장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669년 현종 때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조선 1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능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경처(京妻)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였다. 강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는 것은 물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잘 조성된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돌다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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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청계천 광교(광통교)에 있는 옛 정릉 석물들. 태종은 즉위 후 정릉을 현재 자리로 옮기고,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원래 정릉 능역에 있던 석물들을 다리 복구에 사용하였다.>



태조 승하 후에는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 지금의 정릉 자리로 능을 옮겼다. 또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를 유일한 정비로 태조와 함께 그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그래서 정릉은 종묘에 부묘되지 않아 수백 년간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으로 방치되다가 1669년(현종 10), 260년 만에 복구되었다.

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되찾아 종묘에 처음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는데, 이때의 비를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 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 한다.




- 일 화 -
이성계가 강씨 부인을 처음 만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급히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물바가지에 물을 뜬 후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이성계가 그 연유를 묻자 처녀가 대답했다.  
"갈증으루 급히 달려오신 것 같사온데, 물을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한 이성계는 빼어난 미색에 갸륵한 마음씨까지 갖춘 처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 처녀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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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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