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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조선왕릉의 비밀 ③ - 서오릉]
등록일
2009-07-13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06




사적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명릉길(용두동) 475-95



서오릉 가는길 |
- 통일로, 녹번동, 불광역 사거리, 연신내 사거리 등 어느 곳에서도 진입 가능
- 서대문에서 구파발쪽으로 가다가 녹번 삼거리 ,
연신내 사거리에서 좌회전 서오릉로 진입하면 서오릉 입구 까지 연결



< 창릉 | 昌陵 >



<예종 능의 곡장 너머로 보이는 안순왕후의 능.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사후 ‘우상좌하 남우여좌’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 능이 자리한다.>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안순왕후 능의 고석에 새겨진 귀면 무늬.
예종 능의 고석에는 귀면 무늬가 아닌 문고리 무늬를 새겼는데, 그 생김새가 진짜 북 모양 같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안순왕후는 장순왕후의 뒤를 이어 세자빈이 되었다.


< 경릉 | 敬陵 >



<추존 덕종 능은 난간석이나 망주석이 없고, 무석인도 없으며, 석양과 석호도 한 쌍뿐이다.>
 

덕종(의경세자, 1438~57)과 원비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한씨의 능이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사후 추존된 덕종 능이 매우 간소한 데 비해 생전에 추존된 소혜왕후의 능은 왕비 능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소혜왕후는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하려 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힌 얼마 후 승하했다고 한다.


 < 명릉 | 明陵 >

 

<정자각 뒤로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의 쌍릉이 보인다.
명릉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세 분을 모셨는데,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단릉으로 조영하여, 쌍릉과 단릉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형식의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조선 19대 숙종(1661~1720)과 제1계비 인현왕후(1667~1700)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1687~1757) 김씨의 능이다. 숙종 시기에는 조선 정치사상 정치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하고 붕당정치의 정쟁이 격심했지만,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체제 전반을 복구·정비하는 작업을 거의 완료하는 치적을 남겼다.

 

<명릉 수복방 주초 너머로 보이는 정자각. 인원왕후는 미리 잡아놓은 곳에 능을 조성할 경우 정자각을 새로 지어야 하는 등 막대한 국고 소요가 예상되어, 숙종과 인현왕후 능의 오른쪽 언덕에 단릉으로 조영하였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다.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 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 익릉 | 翼陵 >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왕릉의 봉분이 자리한 높은 언덕을 ‘강岡’이라 하는데, 풍수에서는 땅속에 흐르는 생기를 많이 받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고, 일반 무덤과는 다른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명혜,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춘추 20세로 승하하여 이듬해 2월 22일 이곳에 모셨다.

 
< 홍릉 | 弘陵 >

 

<영조 원비인 정성왕후 능 옆의 빈자리는 영조가 묻힐 곳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사후 동구릉에 자리한 계비 정순왕후 옆에 안장됨에 따라 홍릉의 자리는 빈 터로 남게 되었다.>

조선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했고, 병약하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에 올랐다.



<홍릉은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영조가 훗날 정성왕후 오른쪽에 자신도 묻히고자 자리를 잡아놓았기에 상설 제도도 쌍릉 형식에 맞추었다.>


영조는 왕비의 행장기(行狀記)에서 정성왕후가 43년의 왕궁생활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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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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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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