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보도/설명

제목
[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_① ] 한국 문화유산, 전통과학의 새로운 조명
등록일
2007-09-27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876
글 : 전상운(문화재위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_① ] 한국 문화유산, 전통과학의 새로운 조명




우리 문화유산, 그 빛나는 과학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천하에 유명한 것이고, 이 충무공의 거북선도 철갑선 가운데는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다. 교서관校書館의 금속활자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편리한 방법을 경영하였더라면, 이 시대에 이르러 천만 가지 사물에 관한 세계 만국의 명예가 우리나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이 앞 사람들의 옛 제도를 윤색치 못하였다.(유길준, 『서유견문』 중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고 필자는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홍이섭의 『조선과학사』는 내 학문의 나침반을 우리나라를 향해 바로 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애국심과 민족적 자각과 자존심을 심어주고, 뜨거운 정열을 내 가슴에서 불타게 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우리 전통과학의 과학적 창조성을, 과학사로서 학문적으로 논하는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1960년대 초, 필자는 세 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하나는 미국 예일대 과학사학과 주임교수였던 프라이스의 요청으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혼천시계渾天時計를 조사, 고증하는 내용이었다. 프라이스는 중국 과학사의 세계적 대가인 조세프 니덤과 공동연구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천문시계를 연구·고증하길 원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의 과학사학자를 통해 의뢰를 받은 나는 몇 달 동안, 그야말로 침식을 잊은 노력 끝에 혼천시계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나중에 니덤이 존 메이저 등과 공저로 펴낸 『조선왕조 서운관의 역사』에 혼천시계가 한 챕터로 크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논문을 학술지에 실어주겠다는 데가 없었다. 결국 일본 과학사학회지 『과학사 연구』에 논문을 싣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국 과학사’는 나를 묘한 흥분 속에 빠뜨리며, 그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학문 연구가 이렇게 재밌고 즐거울 수가…….’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서 과학이 태동하다.


문화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과학과 기술의 역사에 있어서 창조적 전통을 이룩했다. 한국 과학의 역사는 중국의 거대한 전통과학의 도도한 흐름에서 볼 때, 실질적으로 중국 과학사의 한 지류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변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과학과 기술은 거의 모든 경우, 한국인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과학기술을 전개했고, 한국의 자연, 기후와 풍토에 어울리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중국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언제나 진취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한국인에게 편리하고 그 자연에 조화되게 변형된 것이다.

한국은 50만 년 전에 구석기 문화가 있었으며, 구석기인이 쓰던 도구 중에는 동부 아시아에서는 거의 발견된 일이 없는 것이 있다. 또 기원전 6천 년경부터는 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신석기인은 중국과는 다른 북방계통의 인종이다. 이들 신석기인의 혈통은, 구석기인과는 달리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한국민족의 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서로 융합되고 또 청동기시대의 새 요소들과 결합되어 한국민족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창조성이 빛을 발한 청동기 미술의 과학기술




기원전 1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던 청동기 문화는 중국의 과학문명과는 다른 북방계 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발전한 것이었고, 비교적 기술 수준이 높았다. 그러한 토착 기술의 전통 위에 중국의 과학과 기술이 들어왔다. 그래서 한국인은 중국의 그것을 언제나 한국적인 것으로 변용하고 개량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청동기로는 청동검과 청동거울을 들 수 있다. 비파모양 청동검과 한국형 청동검, 그리고 2개의 꼭지가 달린 굵은 줄무늬 청동거울과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한국의 독특한 청동기이다. 이 독특한 형식의 청동검과 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 지배자들의 권력의 상징물이거나 종교적인 의식에 쓰는 의기儀器였을 것이다. 이것들은 청동방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신기神器로서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다. 이 청동기들은 디자인이 매우 독특하고 주조 기술이 뛰어나서 한국의 청동기 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기원전 5∼4세기의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그 기하학적 디자인과 정교한 주조 기술의 우수함에서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 유물로 주목된다. 직경 21cm의 이 청동거울에는 0.3mm 간격의 가는 평행선이 1만3천 개 그려져 있는데, 그 선들은 수많은 동심원과 그 원들을 등분하여 생긴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그리고 삼각형들이 정확하게 제도되어 있다.

여기서 컴퍼스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비슷한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한국에는 여러 개가 남아 있지만, 일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된 일이 없다.

한국의 청동기에서 또 하나 독특한 것으로 비파모양 청동검과, 후기에 나타난 한국형 청동검을 들 수 있다. 독특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주조기술에서 그 시기의 다른 지역의 청동기 기술을 능가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출현한 이 한국형 청동검들은 돌 거푸집을 써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는 한꺼번에 수십 자루가 차곡차곡 묻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한국형 청동검은 의기儀器로서뿐만 아니고, 실제로 동물을 찌르는 데도 사용되었다.

한국인이 만든 청동기에는 초기의 것부터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장식용이나 의식용으로 쓰는 청동기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하기 위해서 구리, 주석, 납에 아연을 섞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청동기가 한漢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국에서는 개발되지 않았던 합금기술을 한국의 청동기인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기술자들이 진흙 거푸집과 함께 돌 거푸집을 많이 써서 청동기를 주조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많이 발견되는 돌 거푸집이 중국에서는 드물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산의 바위그림과, 수만 기에 이르는 고인돌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인의 청동기문화가 독특하였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유산이다. 울산의 거대한 바위그림은 그 지역의 청동기인이 본 자연의 모습이 실감나게 담겨있다. 이러한 암각화는 구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고, 청동기시대에 와서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큰 바위를 세워 만든 청동기인의 무덤인 고인돌이 한국인 문화권 안에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

* 고래실에서 발간한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과 고래실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홍보담당관실 (042.481.4678)

-------------------------------------------------------------------------
첨부파일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