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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경궁_통명전 권역]
등록일
2011-01-10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177

 

 

 

 

  

 

 

17. 통명전通明殿 권역

 

 

 

 

 

 

 

17-h-1 통명전通明殿

 

위치와 연혁 : 왕비의 침전이다.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의 대표 건물로 잔치를열고, 존호를 올리고, 가례(嘉禮)를 올리는 등의 일이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원전 1> 팔작지붕의 건물로 용마루가 없다. 1484(성종 15)년 창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소실된것을 1633(인조 11)년에 중건했으나 1790(정조 14)년에 또 불에 탔다. 1801(순조 원)년 화재를 당한 것을 1834(순조 34)년에 복구하여 현재에 이른다. 『한경지략』에 “통명전에는 원래 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정조 때 화재로 탔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때 건물이었다고 한다.”고 되어 있어서 본래 푸른 기와를 덮었고, 고려의 이궁 터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1532~1575년)가 이 곳에서 승하했고, 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해하기 위해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었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일이 있다.

 


뜻풀이 : ‘통명(通明)’은 ‘통달하여 밝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의미도 있다. 크게 밝은 전각에 앉아서 나라를 반석에 올리고, 백성을 오래도록 잘 길러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정백창(鄭百昌,1588~1635년) 1)은 「통명전상량문(通明殿上樑文)」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원전 2> 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의 전각으로 풀이했다.<원전 3> 북경에 있는 대자연복궁(大慈延福宮)의 중전(中殿)도 통명전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숙종의 「통명전내연(通明殿內宴)」,<원전 4> 영조의 「통명전진연일(通明殿進宴日)」<원전 5> 등의 시가 전한다.

 

 

 

  

 

 

17-h-2 양화당養和堂

 

위치와 연혁 : 임금의 편전이면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1484(성종 15)년 창건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1624년), 병자호란(163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때마다 재건하였다. 1830(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3(순조 33, 혹은 34)년에 재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명종 때 이곳에서 독서당 2) 문신들을 친히 시험한 일이 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 이 곳에 거처하기도 하였다.<원전 6> 1665(현종6)년 현종이 이 곳에서 문신들에게 과거 시험을 보이기도 하였다.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년)가 1878(고종 15)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뜻풀이 : ‘양화(養和)’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므로 심신을 조화롭게 가꾸라는 염원을 담았다. 『진서(晉書)』 「하순전(賀循傳)」에 “소요하며 화평을 기르고[養和], 정신을 편안히 하여 자족한다.”<원전 7>라는 용례가 보인다.


제작 정보 :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17-h-3 열천冽泉

 

 

위치와 연혁 : 통명전 뒤쪽 굴뚝 곁에 우물이 있고, 그 뒤의 석축을 쌓은 돌에 새겨진 글이다.


뜻풀이 : ‘열천(冽泉)’은 ‘차가운 샘’이라는 뜻이다. ‘冽(열)’은 ‘洌(열)’과 통용자이다. 뒤뜰의 샘이 맑고 시원하다는 의미로 써 놓은 것이다.

 

  

 

 

17-h-4 성종대왕태실成宗大王胎室

 

 

위치와 연혁 : 성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1928년에 이 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통명전 후원 석축에 난 계단을 올라가면 나온다.


뜻풀이 : ‘성종대왕의 태를 묻은 방’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뒷면에는 ‘成化七年閏九月立, 萬曆六年五月日改立, 順治九年十月日改立, 道光三年五月日改立(성화칠년윤구월립, 만력육년오월일개립, 순치구년십월일개립, 도광삼년오월일개립)’이라고 세로로 나란히 적혀 있다. 성화 7년은 1471년, 만력 6년은 1578년, 순치 9년은 1652년, 도광 3년은 1823년이다.
예전의 안내판에는 1930년 5월에 태실을 이 곳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었고 이에따른 기록들이 많으나 1928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원전 8> 1928년에 이미 옮긴 것임이 분명하다. 현재의 안내판은 바로 잡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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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백창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자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곡구(谷口)·대탄자(大灘子)·천용(天容)이다. 예조 참의·대사간을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으며 주요 저서로는 『현곡집(玄谷集)』 등이 있다.
2) 독서당은 1426(세종 8)년에 세종의 명으로 설치한 기관이며 흔히 호당(湖堂)이라고도 했다. 과거에 급제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이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도서관의 기능을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정조 때 규장각이 등장하여 그 기능을 대신했다.

 


<원전 1> 『열성어제·영종대왕(列聖御製·英宗大王)』 「통명전중술회(通明殿中述懷)」,“噫, 此殿於內殿, 卽一法殿, 凡稱觴上號嘉禮, 皆於此殿爲之.”
<원전 2> 정백창, 『현곡문집(玄谷文集)』권1 「통명전상량문」 “兒郞偉抛梁東, 日出扶桑瑞旭紅,眼看蓬萊無咫尺, 五雲來繞大明宮.”
<원전 3> 숙종, 「통명전」, “紫氣香煙繞曙光, 袞衣深拱殿中央. 列仙蹈舞嵩呼地, 萬朶丹雲擁玉皇.”
<원전 4> 숙종, 「통명전내연」, “昨暮纔成禮, 今朝又稱巵. 由來從舊典, 非是創新儀. 忽憶承歡日, 進思侍宴時. 壽杯誰爲奉, 感極涕交.”
<원전 5> 영조, 「통명전진연일」, “幾年抑鬱志,古殿大宴開. 妙舞淸歌裡, 靄然和氣來.”
<원전 6> 『궁궐지』, “明宗二十年乙丑春, 上御養和堂, 親試讀書堂文臣.”; “仁祖十四年丙子淸兵罷歸, 上自南漢還都, 御昌慶宮養和堂.
<원전 7> 『진서』 「하순전」, “逍遙養和, 恬神自足.”
<원전 8> 『동아일보』, 1928년 11월 2일자(제 2943호), ‘成宗의 胎封을 昌慶苑에 移奉’.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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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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