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설명
- 제목
-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경궁_궁문]
- 등록일
- 2010-12-20
- 주관부서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638
14. 궁문宮門
14-h-1 홍화문弘化門
위치와 연혁 :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 지붕이며 궁궐 정문으로는 드물게 동향을 하고 있다. 창경궁을 처음 지었을 당시인 1484(성종 15)년에 같이 지어졌으며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1616(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으며 이 때 지어진것이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홍화문 앞에는 민가가 없고 넓은 마당이 이어져 있어서, 이 곳에 활터를 세우고 무과 시험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나온다. 이 문은 임금이 백성들을 직접 만나보는 장소로도 자주 쓰였다.<원전 1> 특히 1795(정조 19)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敬懿王后, 1735~1815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에 친히 나아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준 일이 있는데,<원전 2> 이러한 사실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1) 중 「홍화문사미도(弘化門賜米圖)」로 남아 있다.
뜻풀이 :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이다. 『서경』 「주서(周書)·주관(周官)」의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弘化]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사람을 보필한다”<원전 3>에서 유래하였다. 송대의 유학자 채침은 이에 대한 주석에서 ‘홍(弘)’은 ‘넓혀서 키움[張而大之]’이라고 하였고 ‘화(化)’는 ‘천지의 운용이니 운행하되 흔적이 없는 것이다[化者, 天地之用, 運而無迹者也]’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응용되어 ‘덕화(德化)를 널리 떨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원전 4>
홍화문은 원래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했을 때 도성 동북쪽 문(속칭 동소문)의 이름이었다.<원전 5> 성종 때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정문을 홍화문으로 이름짓자 서로 혼동되어 1511(중종 6)년에 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원전 6> 고려 시대에도 정주(定州)에 홍화문이 있었다.<원전 7>
제작 정보 : 편액의 글씨는 김정희의 「서증홍우연(書贈洪祐衍: 홍우연에게 써서 주다)」라는 글에서나,<원전 8>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원전 9> 성종 때 명필인 성임이 썼다고 하나, 지금의 편액은 임진왜란 이후 재건한 것이어서 서사자가 분명하지 않다.
14-h-2 월근문月覲門
위치와 연혁 : 창경궁의 동쪽에 있는 궁문으로 홍화문의 북쪽 궁장에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창경궁 동쪽에 경모궁(景慕宮)을 세웠는데 경모궁으로 참배하러 가기 위해 동쪽 담장에 이 문을 낸 것이다.
뜻풀이 : ‘월근(月覲)’은 ‘매달 뵙는다’는 뜻이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면 경모궁에 참배하러 갈 때 이 문을 지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제작 정보 : ‘覲(근)’자는 속체로 썼기 때문에 정자체와는 차이가 난다.
14-h-3 선인문宣仁門
위치와 연혁 : 창경궁의 동쪽에 있는 궁문으로 홍화문의 남쪽 궁장에 있다. 1857(철종 8)년에 불에 타 1877(고종 14)년에 다시 세웠다. 예전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었다.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의 정문이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출입하였다고 한다. 1506(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날 때 이 문으로 쫓겨났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도 이 선인문 안마당이었다.
뜻풀이 : ‘선인(宣仁)’은 ‘인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다.
14-h-4 집춘문集春門
위치와 연혁 : 창경궁의 동북쪽 궁장에 있는 문이다. 문 밖으로 성균관의 문묘(文廟)를 마주한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이며 태학(太學), 즉 성균관의 서쪽 반교(泮橋) 2)와 가장 가까워서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행차할 때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문 바깥이 바로 주택가로 이어져 출입문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뜻풀이 : ‘집춘(集春)’은 ‘봄의 기운을 모은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판 글씨 중 ‘集(집)’자의 두 번째 필획이 생략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누군가가 깎아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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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행을묘정리의궤』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책이다. 줄여서 『정리의궤』라고도 한다.
2) 반교는 성균관앞을 흐르던 반수(泮水) 위에 놓인 다리를 일컫는다.
<원전 1> 『영조실록』 25년 8월 15일(辛卯).; 『영조실록』 26년 5월 19일(庚申).; 『영조실록』 26
년 7월 3일(癸卯).; 『영조실록』 33년 1월 28일(庚申).; 『영조실록』 34년 9월 16일(己亥).
<원전 2> 『정조실록』 19년 6월 15일(甲午).; 『정조실록』 19년 6월 18일(丁酉).
<원전 3> 『서경』 「주서·주관」,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원전 4> 『한어대사전』 「홍화(弘化)」, “弘揚德化.”
<원전 5> 『태조실록』 5년 9월 24일(己卯).
<원전 6>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6, 「지리전고·도성궁궐(地理典故·都城宮闕)」.
<원전 7>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 7권 「예종문효대왕일(睿宗文孝大王一)」, 정해 2년.
<원전 8> 『완당전집(阮堂全集)』 권7, 「서증홍우연」.
<원전 9> 『동국여지비고』 권1 「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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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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