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보도/설명

제목
[조선왕릉의 비밀 ⑧ - 동구릉 1편 (건원릉,현릉,목릉,휘릉)]
등록일
2009-08-17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204




                      사적 제 193 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동구릉 가는길 :
서울시내 → 내부순환도로 → 북부간선도로 → 구리IC에서 43번 국도로 진출 → 퇴계원 방향으로 U턴 → 좌측에 이정표, 근처능으로는 홍유릉과 사릉이 있다.



                                      < 동구릉 | 東九陵 >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추존왕 익종의 능인 수릉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다.

동구릉에는 검암산 중앙 북쪽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에 14대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이, 그 남쪽 아래로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건원릉 서쪽으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이, 그 다음으로 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이 있고, 그 아래로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에 이어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이 있으며, 맨 왼쪽으로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등 모두 아홉 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동구릉은 능제의 변화와 조선왕조 500년의 부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더욱이 능 전역에 우거져 있는 숲과 능역을 가로지르는 개울물 등 자연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 건원릉 | 健元陵 >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 등에 변화를 주고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등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조선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이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는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건원릉 봉분은 푸른 잔디가 아니라 억새를 사초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죽기 전 유독 고향을 그리워하였기에 태종이 고향인 함흥 땅에서 가져오도록 했다.>

태조의 비는 신의왕후 한씨(齊陵, 북한)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貞陵, 정릉동)다.

태종 8년 74세로 승하했으며, 묘호를 태조(太祖)라 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했다. 보통 능호는 외자로 하지만 건원능만 두 자이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봉분. 건원릉의 봉분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높게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기본 능제는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석의 조형 등 세부적으로는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 일화 ★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에 뜻을 잃어버린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뒤 정종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때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들이 가면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咸興差使)’란 말이 생겨났다. 한번 가기만 하면 깜깜소식이란 뜻으로,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 올 때 쓰이는 말이다.




                                   < 현릉 | 顯陵 >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 현릉은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각각 자리한 동원이강릉이다. 정자각 뒤로 보이는 것이 문종 능, 비각 뒤가 현덕왕후 능이다>

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현덕왕후 능에서 바라본 문종의 능. 현릉은 조선시대 오례에 관한 의식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부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생전에 영릉 오른쪽 언덕(본래 세종의 영릉이 지금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다)을 장지로 정했으나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하고 이곳 건원릉 동쪽에 안장되었다. 구 영릉이 조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옮겨졌으므로 현릉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이다.

현덕왕후는 왕후에 오르기 전 1441년에 원손(단종)을 출산하고 그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군에 예장되었다.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숭되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선이 굵게 조각된 현덕왕후 능의 문·무석인.>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능호를 바꾸었고,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현덕왕후는 추폐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져 물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 후 1513년(중종 8)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어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신주는 다시 종묘에 봉안되었다.



 
                                                
< 목릉 | 陵 > 

 
<선조,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세 개의 언덕에 따로 모셔진 동원삼강릉이다. 동원삼강릉 형식으로는 조선왕릉 가운데 목릉이 유일하다.>
 

조선 14대 선조(宣祖, 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1600)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동원이강의 형식의 변형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567년 왕으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정자각 바로 뒤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그 옆이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꺾인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의인왕후 박씨는 건원릉 동쪽 셋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
전형적인 조선왕릉의 상설 제도를 보여주는 선조 능.>

 
인목왕후 김씨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고 자신은 서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신분이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건원릉 동쪽 다섯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 휘릉 |
陵 >


          
<삼면이 곡장으로 둘러싸인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88)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다.
 

                 <정자각은 양옆에 익랑이 붙은 다섯 칸짜리로 규모가 크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다섯 개이다. 태조 건원릉 때 다섯 개였던 고석이 세종 영릉 이후 네 개로 조정되었다가, 휘릉에 와서 다시 건원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시기의 붕당정치는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

*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

 

첨부파일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