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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흥복전 권역]
등록일
2010-05-17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51








11. 흥복전 권역









11-h-1 흥복전興福殿

 

위치와 연혁 : 흥복전은 왕의 후궁들이 살던 공간인 빈궁(嬪宮)이다. 궁궐 내 여성 내명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독립된 건물 채인 각 전(殿)에 배속시키는 본부 역할을 했으며, 외국 사신을 만나는 편전으로도 활용됐다.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 1808~1890년) 1)가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였다. 

 

뜻풀이 : ‘흥복(興福)’은 ‘복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경전 등에 용례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한서(漢書)』 「공광전(孔光傳)」에 “하늘에 순응하고 이단을 막으며,화를 없애고 복을 일으킨다[興福].”라는 표현이 보인다. 라.”<원전 1>
 


제작 정보 : 『북궐도형』에는 나타나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현재 흥복전 일대가 대대적인 복원 사업 중이며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덕수궁에도 흥복전이 있었다.



 

11-h-2 집경당緝敬堂

 
위치와 연혁 :
1867(고종 4)년~1~ 873(고종 1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함화당과 가운데 3칸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함화당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여러 채의 부속 건물과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으며 현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주로 침전(寢殿)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종이 향원정 뒤에 건청궁을 짓고 머물 당시에는 이 곳 집경당과 함화당에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지을 때 집경당과 함화당이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뜻풀이 : ‘집경(緝敬)’은 ‘계속하여 공경한다’는 뜻이다. ‘집(緝)’은 ‘계속한다’는 뜻이다. 원 출전은 『시경』 「대아(大雅)^문왕(文王)」 편이다. 여기에는 “심원하신 문왕이여! 아, 공경을 계속하여 밝히셨도다[緝熙敬止]. 위대한 천명은 상나라 자손들에게 있었도다.”<원전 2>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중 ‘집희경지(緝熙敬止)’에서 두 글자를 따 온 것이다. 『대학』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止於至善(지어지선; 지극한 선에 머묾)’의 뜻을 풀이하는 데 응용하였는데, 이 때 ‘집희경지’를 ‘계속하여 밝혀서 공경하여 그쳤다.’라고 풀이하였다. 『시경』에서는 ‘지(止)’를 어조사로 보았으나 『대학』에서는 ‘경지(敬止)’를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치는 바에 편안함을 말한다’고 하여 ‘지(止)’를 ‘머물다’, ‘그친다’는 의미를 지닌 실사(實辭)로 본 것이다. 

 

제작 정보 :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북궐도형』에는 실려 있으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11-h-3 함화당咸和堂

 

위치와 연혁 : 집경당의 서쪽에 있다. 집경당과 내부에서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복도 삼간으로 이어져 있다. 예전에는 복도 남쪽에 샛담이 있고 계명문이라는 일문(日門)과 영춘문이라는 월문(月門)이 있었다. 또한 영지문^창무문 등 여러 일각 대문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현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뜻풀이 : ‘함화(咸和)’는 ‘모두가 화합하다’는 뜻이다. 『서경』 「무일(無逸)」 편 2)에 “아름답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공손하시어 백성들을 품어 보호하시며,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생기가 나게 하며, 아침부터 한낮과 저녁에 이르기까지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보살펴, 만백성들을 모두 화합하게[咸和]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작 정보 :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북궐도형』에는 나타나나 『궁궐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11-j-3 함화당咸和堂의 주련 




 

위치와 연혁 : 함화당의 기둥에 붙어 있다.
 

뜻풀이 :

(1) 可釣可?盤谷序(가조가경반곡서)

낚시질할 만하고 밭갈이할 만하니 반곡서(盤谷序)이고,<원전 3>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은자의 자족적인 생활을 그린 구절이다. 탈세속의 공간에서 자족하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반곡서’는 당나라 한유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는 글)」을 가리킨다. 벗인 이원(李愿)이 반곡에 은거해 살면서 세상의 명리에 초월하여 홀로 유유자적하겠다고 말하자 한유가 이에 찬동하여 쓴 글이다.
<원전 4> 이 구절은 이 곳이 한유가 이원을 전송하며 쓴 글에 나오는 그 반곡과 같다는 말이다. 원나라의 양공원(楊公遠)이 지은 「초하여중(初夏旅中)」 오수(五首)<원전 5> 중 제 5수에 나오는 구절을 따온 것인데, 짝이 되는 뒷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뒷 구절은 다음과 같다.

 

 堪詩堪?輞川圖(감시감화망천도)

시 지을 만하고 그림 그릴 만하니 망천도(輞川圖) 3)라네. 

 

제작 정보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 같은 문구의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2)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

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 4)이요,<원전 6>

 

도성 안의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는 궁궐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701~761 또는 699~759년) 5)의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 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奉和聖製 從蓬萊向興慶閣道中 留春雨中 春望之作 應制;임금께서 지으신 「봉래궁에서 흥경궁을 가는 행각에서 봄비에 취해」 작품에 화답하여 짓다)」에서 따온 구절인데 짝이 되는 뒤의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

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제작 정보 :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과 한정당(閒靜堂)에도 같은 문구의 주련이 짝이 갖추어져 걸려 있다.

  

뜻풀이 :

(3) 能招過客飮文字(능초과객음문자)

과객을 불러 시문을 음미할 만하고,<원전 7>

 

혼자 조용히 은거하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문장을 논하기도 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송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년) 6)이 지은 장편고시 「화왕미지등고재(和王微之登高齋)」 가운데 제 1수의 한 구절인데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山水又足供歡?(산수우족공환해)

산수는 또 기쁜 웃음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네.


 

 
뜻풀이 :

(4) 閒眠東閣修花史(한면동각수화사)

한가로이 동각에서 잠자며 『화사(花史)』를 수정하고,

(5) 偶坐南池注水經(우좌남지주수경)

우연히 남지에 앉아 『수경(水經)』7)에 주석을 하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를 그렸다. 동쪽 누각에서 한가로이 화사, 곧 화초에 대한 책을 다듬어 보고, 남쪽 연못에서 『수경』에 주석을 다는 은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동각(東閣)은 양(梁) 나라 때 사람인 하손(何遜, ?~518년)이 자신의 동각을 개방하고 문인(文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에서 따온 말로 여러 시에서관용적으로 쓰이곤 했다. 이를테면 두보(杜甫, 712~770년)의 시에 “동각 관아의매화가 시흥을 일으키니,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와 흡사하네.”라는 구절이 있다.<원전 8> 『추구(推句)』8)에도 “서쪽 정자에는 강 위에 달 뜨고, 동각의 눈 속에 매화가 피었네(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라는, 작자 미상의 구절이 실려 있다.
‘남지(南池)’는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 있는 지명으로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년)이 여기서 잔치를 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종원이 지은 「배최사군유연남지서(陪崔使君遊宴南池序)」라는 글이 있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를 나타내는 ‘鐵保(철보)’라는 글이 적혀 있고, 아래에는 ‘又字鐵卿(우자철향)’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철보(1752~1824년)는 호가 매암(梅庵) 9), 자가 야정(冶亭)으로 만주 출신의 청나라 서예가이며 당대의 명가인 유용(劉墉, 1719~1804?년), 옹방강(翁方綱, 1733~1818년) 10) 등과 명성이 나란하였다. 조선의 북학파 학자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와 교유하여 자주 서신을 왕래하였으며, 박제가는 연작 「회인시(懷人詩)」에서 세 차례나 그에 대해 읊었다. 

창덕궁 낙선재에도 같은 구절의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6) 平生所學爲何事(평생소학위하사)

평생에 배운 바는 무슨 일을 위함인가?

(7) 後世有人知此心(후세유인지차심)

후세에 뉘 있어서 이 마음을 알아 주리. 

 

평생 동안 공부한 경륜이 지금 쓰이지 못한 한탄과 함께 후세에는 알아 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위안을 가져 보는 내용이다.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년)의 시 「서창독작(西?獨酌)」의 한 구절<원전 9>이다.

 
 

 


뜻풀이 :

(8) 妙書鴻戱秋江水(묘서홍희추강수)

절묘한 글씨는 가을 강물에서 기러기가 희롱하는 듯하고,

(9) 好句風行曉苑花(호구풍행효원화)

아름다운 시 구절은 새벽 화원에 바람이 지나가는 듯하네.

 

절묘한 글씨의 품격을 가을 강물에서 기러기가 유유히 헤엄치며 노니는 것에 비유하고, 아름다운 시 구절을 새벽 화원의 꽃을 스치며 부는 바람에 비유하였다. 원(元) 나라 시인 유선(劉詵)의 시 「화장한영견수(和張漢英見壽)」 중에 나오는 구절<원전 10>이다.

 
 

(10)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

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 11)라고 씌어 있고,

(11)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

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 12)이라고 새겨졌네.

  

기와에는 장수하라는 뜻의 글을 써 놓았고, 구리 쟁반에는 부귀와 복을 누리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는 뜻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필사자를 나타내는 ‘趙光(조광)’ 13)이라는 글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蓉舫(용방)’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용방은 청나라 문인 조광(1797~1865년)의 자이다. 창덕궁 낙선재와 한정당에도 같은 주련이 있다.

 
 

 





뜻풀이 :

(12) 誰憐?筆才名重(수련화필재명중)

그림과 글씨로 재주와 명성 높음을 누가 어여삐 여기리요.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알아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출전 미상이며 대구(對句)가 되는 글이 없어 한 짝은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13) 巖前倚杖看雲起(암전의장간운기)

바위 앞에 지팡이 짚고 구름 이는 모습 바라보며, 

 

산속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다. 원나라 시인 조문회(曹文晦)의 시 「성수산휴서(聖壽山休暑)」의 한 구절<원전 11>이다.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松下橫?待鶴歸(송하횡금대학귀)

솔 아래서 거문고 끼고 학이 돌아오길 기다리네.

  

(14) 轉覺林泉興味長(전각임천흥미장)

산림 속 흥미가 길어짐을 더욱 느끼리. 

 

아래에 소개한 분실된 앞 구절과 연관지어 해석해 보면, 스님이 선물해 준 부채를 들고 아름다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산림 속의 흥취가 점점 길어짐을 더욱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송(宋) 나라 시인 채양(蔡襄, 1012~1067년) 14)의 시 「장주백련승종요견유지선 매선각서일수(?州白蓮僧宗要見遺紙扇 每扇各書一首)」의 제 9수 중 한 구절 <원전 12>이다. 짝이 되는 앞 구절은 분실되었다. 분실된 앞 구절은 다음과 같다. 

 

直應携去林泉好(직응휴거임천호)

(부채를) 받아들고 아름다운 산천으로 가게 되면,

 
 

(15) 渭北先殷尊酒懷(위북선은준주회)

위수 북쪽의 옛 은나라, 술잔을 그리워하네. 

 

자세한 의미와 출전 등을 알 수 없다. 대구가 되는 글이 없어 한 짝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선은(先殷)’의 뜻은 미상이며 ‘尊(준)’은 ‘樽(준)’과 통용된 글자이다. 두보의 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며)」시의 “이곳 위수 북쪽에는 봄 나무에 싹이 트나 / 그 곳 강남에는 해가 구름에 지겠지 / 어느 때나 함께 술잔을 나누며 다시 한 번 글을 논하리오(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尊酒, 重與細論文).”라는 구절을 응용한 표현인 듯하다.

 

 

  

(16) 養竹不除當路筍(양죽불제당로순)

대 기르기 좋아하여 길에 자란 죽순도 베지 않고,

(17) 愛松留得?門枝(애송유득애문지)

솔을 사랑해 문 가린 가지도 남겨 두었네. 

 

자연을 사랑하여 인위적인 손상을 가하지 않는 천연스런 삶을 읊은 구절이다.

당나라 스님 관휴(貫休, 832~912년) 15)의 시 「산거시(山居詩二十四首)」 이십사수 중 제 8수의 함련(?聯)<원전 13>에서 따온 구절이다. ‘문(門)’은 대부분의 문헌에 ‘인(人)’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 선향재(善香齋)에도 같은 주련이 있다. 

 

(18) 樂意相關禽對語(낙의상관금대어)

즐거운 뜻 서로 관계하여 새들은 마주하여 지저귀고, 

 

즐거운 마음을 나누는 듯이 서로 마주 대해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송나라 시인 석연년(石延年, 994~1041년) 17)의 시 「금향장씨원정(金鄕張氏園亭)」에서 따온 구절<원전 14>이다. 짝이 되는 뒤 구절은 현재 분실되었다. 분실된 뒤 구절은 다음과 같다. 

 

生香不斷樹交花(생향불단수교화)

향기 풍겨 끊이지 않으니 나무에는 꽃이 흐드러지네. 

 

창덕궁 연경당에도 같은 내용의 주련이 짝이 갖추어져 걸려 있다.

 

 

 

 

11-h-4 하지荷池

 
위치와 연혁 :
함화당(咸和堂)의 뒤뜰에 있는 장방형의 조그마한 돌 연못이다.

인공으로 조성한 석연지(石蓮池)인瀀⃕棖咲劉堀₴ꓓ룅퀀⃎耀⃅믇砀⃕ꗆ탈ᗇ琀⃇裇䳅킳쐀₽袭法墬 ഀે碬⃅믇䐀₹체€菇䀀Ⰰ⃆ࣈӅ킲鐀⃕棖咲劉琀₲㲸尀₴墷㠀⃇装듁ᰀ⃕ꗆ탈ᖬﲲ鐀€ꦹ겴ᣅ됀 ഀે装좮 ₵䲻㣇㲸尀⃍铈ᖴᲲ⸀㰀⼀猀瀀愀渀㸀㰀⼀昀漀渀琀㸀㰀⼀瀀㸀ഀ਀㰀瀀 猀琀礀氀攀㴀∀氀椀渀攀ⴀ栀攀椀最栀琀㨀㄀㠀 ─㬀 洀愀爀最椀渀ⴀ琀漀瀀㨀 㬀 洀愀爀最椀渀ⴀ戀漀琀琀漀洀㨀 㬀∀㸀㰀昀漀渀琀 昀愀挀攀㴀⊭璹밀∀㸀㰀猀瀀愀渀 猀琀礀氀攀㴀∀昀漀渀琀ⴀ猀椀稀攀㨀㄀ 瀀琀㬀∀㸀㰀戀爀㸀㰀椀洀最 猀爀挀㴀∀栀琀琀瀀㨀⼀⼀挀愀昀攀⸀挀栀愀⸀最漀⸀欀爀⼀渀攀眀猀昀椀氀攀⼀㈀ ㄀  㔀㄀㜀15[0].jpg" align="bottom" width="500" height="375" border="0">

 
 

뜻풀이 : ‘하지(荷池)’는 ‘연꽃이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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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종(효명세자)의 비다. 1819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30년 효명세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1834년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하응의 둘째아들을 고종으로 즉위 시키고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2) 「무일」 편은 주공이 성왕에게 왕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역대 뛰어난 임금들의 치세를 들어 훈계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3) <망천도>는 왕유가 자신의 별서가 있는 망천의 풍경을 그린 그림. 왕유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유유자적하였다. 송나라 소식(蘇軾) 이 이 그림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 ?中有詩).”라고 평하였다.

 4) 봉궐(鳳闕): 궁궐의 문 또는 궁궐을 이르는말. 중국 한나라때에 궁궐의 문 위에 구리로 만든 봉황을 장식한데서 유래한다.

 5) 왕유는 자(字)는 마힐(摩詰).당 격변기에 관직을 맡았다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고 자연에 은거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는데,그림은 현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동기창에 의해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6) 왕안석은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정치적으로는 신법 개혁으로 유명하다.

 7) 수경은 3세기경에 이루어진 책으로 하천의 발원지, 합류지, 입해지(入海地) 등을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한나라의 상흠(桑欽), 또는 진(晉)나라의 곽박(郭璞)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북위때의 역도원(?道元, 469~527년)이 주석을 더한『수경주(水經注)』가 유명하다.

 8) 『추구』란 오언시(五言詩)를 대구위주로 추려 모아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이다.

 9)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는 자(字)가 매암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인 듯하다.

 10) 13-h-5 초양문 참조.

 11) 연년익수: 수명을 늘려 더욱 오래살라는 뜻이다.

 12) 부귀길상: 부귀와 좋은 복을 누리라는 뜻이다.

 13) 조광은 청나라 운남(雲南) 곤명(昆明) 출신으로 자는 용방, 호는 퇴암(退庵), 시호는 문각(文恪)이다. 1820(가경25)년 진사가 되어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시문을 잘 했고, 동기창의 서법에 뛰어났다.

 14) 채양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이자 서예가, 문신이었으나 풍류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자 군모(君謨).시호 충혜(忠惠). 안진경체로 독자적 서풍을 이루어 소식, 미불 등과 함께 송나라의 4대가로 일컬어졌다.

 15) 관휴는 당말 오대의 승려로 절강성 출신이다. 오나라, 월나라 등을 유랑하며 『법화경』,『기신론』을 전했다. 수묵화에 조예가 깊었다. 

16) 석연년은 자는 만경(曼卿). 송 진종 때 대리시승(大理寺丞)을 지냈다. 문장이 매우 기운이 있고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원전 1> 『한서』 「공광전」, “應天塞異, 銷禍興福.” 

<원전 2> 『시경』 「대아^문왕」,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假哉天命, 有商孫子.” 

<원전 3> 『서경』 「무일」, “徽柔懿恭, 懷保小民, 惠鮮鰥寡, 自朝至于日中?, 不遑暇食, 用咸和萬民.”

<원전 4> 한유, 「송이원귀반곡서」. “釣於水鮮可食”, “盤之中, 維子之宮. 盤之土, 可以稼. 盤之泉, 可濯可沿. 盤之阻, 誰爭子所?” 

<원전 5> 양공원, 「초하여중」 오수, 제 5수 “每憶吾廬隱者居 天然景物足淸娛 樹林陰?鶯求友簾幕深沈燕引雛 可釣可耕盤谷序 堪詩堪?輞川圖 何當歸去北?臥 能勝羲皇以上無.” 

<원전 6> 왕유,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 “渭水自?秦甸曲 黃山舊繞漢宮斜 ?輿?出仙門柳 閣道遙看上苑花雲裏帝城雙鳳闕 雨中春樹萬人家 爲乘陽氣行時令 不是宸遊重物華.”

<원전 7> 왕안석, 『임천문집』 권6, 「화왕미지등고재」 중 제 1수. “寒雲沈屯白日埋 河漢蕩坼天如? 衡門兼旬限泥? ?聽?木鳴相? 蕭辰忽掃纖?盡 北嶺初出?嵬嵬 微之新詩動我目 爛若火齊金盤堆 想?諸彦眺平野 高論歷?秦以來?船淋浪始快意 忽憶歸雲胡爲哉 念君少壯輟游衍 發揮春秋名玉杯 書成不得斷國論 但此空語傳八垓 登臨興罷因感觸 更欲遠引追宗雷 君知富貴亦何有 諂譽未足償譏排 風豪雨橫費調燮坐使髮背爲黃台 留賓往往夜參半 雖有樽俎無由開 江南佳麗非一日 況乃故園名池台 能招過客飮文字 山水又足供歡? 剩留官屋貯酒母 取醉不竭當如淮.” 

<원전 8> 두보, 「화백적등촉주동정정 송객봉조매 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 

<원전 9> 육유, 「서창독작」, “却掃衡門歲月深殘骸況復病交侵 平生所學爲何事 後世有人知此心 水落枯萍?破塊 霜高丹葉照橫林 一樽濁酒西?下 安得無功與共斟.” 

<원전 10> 유선, 「화장한영견수」, “吾里文章小晏家 才情欲學賈長沙 妙書鴻戱秋江水 佳句風行曉苑花 富貴未來歌?角 畸窮相對賦煎茶 芳年京國蜚騰近 預想春車墮馬?.” 

<원전 11> 조문회, 「성수산휴서」, “桐柏山西暑氣微 碧蘿凉吹透?衣 巖前倚杖看雲起 松下橫?待鶴歸 白眼看人多變態 靑雲得路有危機 下方風浪休回首 深閉柴門到夕暉.” 

<원전 12> 채양, 「장주백련승종요견유지선 매선각서일수」, 제 9수 “不掩歌脣向?堂 不須名筆作花房 直應携去林泉好 轉覺林泉興味長.” 

<원전 13> 관휴, 「산거시」 이십사 수, “心心心不住希夷 石屋???髮垂 養竹不除當路筍 愛松留得?人枝 焚香開卷霞生? 捲箔冥心月在池多少故人頭盡白 不知今日又何之.” 

<원전 14> 석연년, 「금향장씨원정」, “亭館連城敵謝家 四時園色?明霞 窓迎西渭封侯竹 地接東陵隱士家 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縱遊會約無留事 醉待參橫月落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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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1]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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