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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문화유산 여행길_금강을 따라 떠나는 예학스터디 2]
등록일
2011-12-27
주관부서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418

 

 

 

: 돈암서원과 노강서원 :

 

 

우리나라 서원건축의 일반적 배치방식은 강학공간인 강당과 학생들의 숙박공간인 동재와 서재를 앞쪽에 두고 뒤편으로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이다. 서원건축의 일반적 구조를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돈암서원을 꼽는 것은 여유로운 공간으로 넉넉하게 자리하는 건물 구성과 별도의 강당공간인 응도당(凝道堂), 그리고 크고 작은 비석들이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의 품격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으로 김장생은 모든 생활의 규율을 의미하는 예(禮)의 문제를 학문적 영역으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건축구성의 탁월함과 어울리게 왕의 친필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며 이 곳에 배향된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은 문묘 18현에 모셔졌다. 또한 조선 후기 정계의 중심이 되었던 노론의 중심지였다.

 

 

한편, 소론의 중심지였던 노강서원에는 윤황을 비롯하여 아들 윤문거와 윤선거, 손자 윤증 등 파평 윤씨 일가 3대를 배향하고 있다. 스승인 우암과 북벌 주장에 따른 명분론의 논쟁인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분리되어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은 관직보다는 예론을 바탕으로 한 학자로 이름을 높였다. 논산 명재고택은 윤증이 살던 집으로 최근에는 '전통 한옥 답사지''고택체험''한옥숙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마당에 정갈하게 놓인 수백 개의 장독이 눈길을 끌며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흐르는 곳이다.

 

 

 

: 군산 :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그린 조선일보 연재소설『탁류(濁流)』는 호남 최대의 곡창지대이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많은 물자를 수탈당했던 당시 군산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탁류의 저자 채만식은 맑은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오며 혼탁해 지듯 시대와 사회에 얽혀 타락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항과 함께 일제 강점기 쌀 수탈의 교두보였던 군산. 일제는 갈대밭이었던 내항에서 월명동에 이르는 거리에 일본인 마을을 조성했다. 군산의 적산가옥(敵産家屋)들은 개항을 전후로 격변하는 역사를 온몸으로 맞아들인 흔적이다. 특히 군산시 신흥동, 장미동, 영화동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거주했던 집이 100여 채나 남아 있다. 일본의 한 일간지에서 군산을 두고 70년대 도쿄의 거리를 연상케 한다고 보도한 적이 있을정도로 일본풍이 물씬 풍긴다. 동국사 같은 경우는 일본 내에서도 원형이 보존된 사찰이 드물어 일본인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러한 건축물이 대한민국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관광지로 익숙해졌지만 일제강점기 군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민족의 아픔이 있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치욕스럽게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금강이 들려주는 흘러간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일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화려하게 꽃피웠던 예학의 향기는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와 일제의 사주를 받은 황도유학자들에 의해 퇴색되고 저물어갔다.

 

 

 

 

: Information :

 

 

 

 

: Interview :

 

글쓴이 : 최영갑 (성균관 기획처장/ 저서「공자와 맹자의 도덕철학」, 역서「논어1·2」등)

 

Q 향교와 서원의 특징은 무엇인가?

 

A 향교가 오늘날의 국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에 해당한다. 조선중기에 일어난 네 번의 큰 사화 이후에는 사원이 더 활성화 되었다. 당시 서원의 사교육이라는 것은 상당한 인물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지역에 머물며 학문을 닦고 뜻 맞는 제자들과 토론하며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대단히 깊이가 있었다. 제향기능에 있어서는 향교가 공자와 맹자 등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반면에 서원에서는 지역 출신 또는 연고가 있는 인물을 배향했다.

 

Q 우리나라 유학이 중국의 그것과 다른 점은?

 

A ‘예학’이야말로 성리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고 중국과 차별화된 학문이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배우며 예학을 완성해 간다. 예학은 기호학파의 중심사상이었으며 조선후기 유학의 중심지는 충청권, 그 가운데서도 논산이었다. 그리고 돈암서원은 그야말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중심인물인 김장생, 김집 부자(父子)는 유일하게 한 가문에서 두 명이 문묘 18현에 모셔졌다.

 

Q 조선 유학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A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 일제는 19세기말 이미 조선의 정치적, 사상적 근간을 이루었던 유학에 대해 역사적 왜곡을 감행하며 침략준비를 마쳤다. 또한 향교에 친일파들을 심어 우리문화의 맥을 끊고 조선시대 사색당쟁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며 민심을 교란시켰다. 조선시대의 당쟁을 나쁘게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주입된 기억 탓이다. 500년간 문치(文治)를 이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당이 없는 나라가 없고 이런저런 면을 더 중요시하며 정책을 펴나가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의 당쟁은 학문과 이론을 기초로 한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많이 있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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