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지정예고
- 제목
- 夫兵者, 不祥之器也에 대한 부연 설명
- 작성자
- 성대현
- 작성일
- 2023-07-03
- 조회수
- 305
문화재청공고 제2023-266호 관련,
2023.6.27일 게시한 글에 대해 부연 설명을 공유합니다.
(이글은 국보로 지정 예고된, 이순신 장검(長劒)과 국보지정 절차에 한정합니다.)
문화재청에서 제시한 국보지정 사유가 불명확하기에 해당 근거에 대한 연구 결과가 명확히 제시되고, 학계와 사회에서 인정될 때까지 국보지정이 연기되어야 합니다.
첫째, 국보로 지정해야 하는 사상적 뿌리가 무엇인지 근거와 설명이 한참 부족합니다. 우리 국민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유물이 지니는 의의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그 의의와 설명이 명확해야 합니다. 문화재청에서 기재한 사유에서는 그런 의의와 설명을 찾기 어렵습니다. 국보 지정 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해당 유물 소개에 등재할 의의와 설명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항은 일본의 도검 제작 기법을 배워서 이충무공 장검을 만들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의 혼이 있다면 하늘에서 통곡할 노릇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웠는데 임진왜란 중에 왜구의 제작 기법을 배워서 장검(長劒)를 만들어 왜적에 대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고 설명하는지? 그런 발상을 필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국민을 죽이고, 문화재와 건물을 불태우고, 약탈해 간 저들의 기술을 배워서 만든 장검(長劒)에 이순신 장군이 그 정신에 새기고 담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허탈하기 끝이 없습니다.
문화재청이 기재하고 선전하고 있는 논리에는 위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작 모르고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니면, 문화재청에서 과거를 잊고 친일하기로 이제 마음을 굳힌 것일까요? 만약,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의 도검 제작기법이 이미 그런 방식이 있었다면 연구를 더해, 우리의 독자적 도검 제작 기법에 이미 그런 방식이 있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의 뿌리를 찾는 일이 아닐까요? 연구가 부족하면 연구를 먼저 할 일입니다.
국보지정 요청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순신의 직계 후손들은 이런 낯 뜨거운 일에 대해 어떻게 의의를 갖고 해석하는지 궁금합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관심이 없거나, 그냥 국보로 지정해주면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이충무공전서(1795년), 잡저(雜著)’ 편에 기록된 내역과 장검(長劒)에 새겨진 내역이 일치하기 때문에 이 유물이 이순신 장군이 활용했던 검이라는 연결성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정조 임금이 ‘이충무공전서’을 발간하기 200여년 전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분입니다. 문화재청에서 밝힌 도검 제작 기법에 따른 연대로 생각해보면 임진왜란 후, 후손들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다고 얼마든지 추정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도검에 새겨 있는 제작연대(갑오년사월)와 제작자(태귀련, 이무생)이란 구절에 대해 명확히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갑오년은 역사적은 60년마다 지속 반복됩니다. 1594년이라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면, 대충 연결 지어 해석하는 일을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태귀련(太貴連)이라는 글자와 ‘이충무공전서’에 기재되어 있는 태구련이라는 사람을 연관하여 해석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살펴서 분석해야 할 사항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많은 교수와 연구자들이 검의 제작 연대를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한 결과가 대립되는 바, 이에 대한 의구심을 명확히 한 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군사사(史) 분야에서 어떤 의미를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의미가 있는 일이라면 의미를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검 제작 기법을 우리가 배웠다면 어떤 의의를 갖고 있는지 명확히 할 일입니다. 일제시대 친일 관료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사관을 기초로, 그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이어받아 교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셋째, 무엇보다도 역사적 유물의 보존과 관리 관점을 살피기 이전에, 칼(刀)이 지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칼(刀)은 힘을 의미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칼(사무라이)의 정신과 조총이란 강화된 힘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양민을 죽이고 많은 문화재를 불태우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칼(刀), 즉, 물리적 힘을 사상의 뿌리에 두고 있었기에 벌어진 비평화적이고 폭력적인 침략입니다.
근대사에서도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힘을 근본으로 여기는 사상의 틀을 재빠르게 받아들여, 동아시아를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침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처참한 36년을 보냈으며, 힘을 바탕으로 한 세상의 체계속에서 굴욕과 설움을 버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칼(刀),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르는 틀은 더 큰 힘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한계성을 지닙니다. 원자폭탄 2방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사례는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3대 철학인 노자, 공자, 불가의 철학에서는 힘의 논리, 칼(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경계하라는 교훈 몇 구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자 도덕경 31장의 교훈입니다. ‘夫兵者, 不祥之器也’,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다. 왜? 살인을 위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물건이라면, 힘을 강조하지 않고 조용히 지니고 꼭 필요한 경우, 전시(戰時)에만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힘을 내세우고 강조하며 힘에 의존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어지럽게 변합니다. 즉, 힘의 철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경우입니다.
칼의 힘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전시(戰時)에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시에 힘을 내세우는 일은 크게 경계할 사항입니다. 자신이 힘이 있다고 자만하여 전쟁과 같은 상태로 몰고가는 묘한 악(惡)의 힘이 숨겨져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신(精神)을 일깨우고, 마음에 새기는 상징적, 숭상 도구로 검(劒)이 단연 최고입니다. 강자에게 절대 복종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질서(禮) 체계(齊)를 세우는 일에 탁월한 상징성을 부여합니다. 사람들에게 칼날의 두려움을 심어주고, 자유와 평화보다는 복종을 강요합니다.
공자의 철학, 논어 17.4구절에서도 ‘割雞焉用牛刀’라는 언어를 통해 공자가 큰 실수를 한 사례를 일화로 만들어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자(孔子)같은 큰 스승도 실수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공자는 제자 자유, 언(偃)의 일깨움에 실수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고 농담이었다고 웃어 넘깁니다. 공자의 실수는 사람을 대함에 힘, 칼(刀)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제자 언(偃)이 일깨워 준 사항은 사람을 대할 때 사랑(愛)이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17.4구절에 대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한 공자의 철학마저 왜곡된 상태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칼의 쓰임에만 관심을 두고, 칼의 의의에 대해서는 잊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칼을 숭상하고, 칼의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수록 서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가 누르는 힘의 두려움에 얼어버린 마음은 나부터 목숨을 부지하고,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철학에서 힘과 칼(刀)에 의지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고, 힘에 의존해서 무력을 강제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것은 동양 3대 사상을 삶의 틀 깊이 뿌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힘을 위주로 하는 사상의 틀을 국민 정서에 깊이 심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굳이 역사적 유물의 의의와 가치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장검(長劍)을 국보로 만들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국보지정 관련, 문화재청에 다음과 같은 제언을 드립니다.
제언 드리는 사상은 향후 국보지정 및 제외, 검토 절차에도 활용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통해 문화재에 대해 올바른 의의와 가치를 찾고, 그런 활동을 통해 철학, 역사, 문화재 관리 등 인문 분야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장 먼저 국보지정 절차, 과정, 결과에 대한 투명성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를 통한 해당 문화재의 의의와 가치 확보 노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철학, 역사, 해당 유물의 문화재 관리/기술/검증 분야가 참여한 연구 과제화 및 활동을 거치고, 연구 수행 결과 보고서를 통해 검증된 유물의 의의와 가치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국보 선정 연구 참여자는 실명으로 할 것이며, 실명 공개에 따라 왜곡된 가치와 의의를 부여한 사람은 그에 따른 자신 명예의 실추와 국가 문화 정신에 폐해를 끼친 도덕적 책임을 지움으로써, 어설픈 결과를 근거로 문화재를 평가하고, 등재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과정과 절차, 결과에 대해서 투명하게 모두 공개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등재되어 있는 국보에 대한 설명이 다분히 임의적이며, 어설프며, 지어낸 듯한 설명이 다수인 점(필자는 고려청자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을 별도로 문화재청에 제기한 바 있음)을 살펴보면 이런 활동을 통해 왜곡된 의의와 가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연구보고서에서 도출된 철학적 의의와 가치를 기준으로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국보지정이 유물을 통해 국민 정신과 정체성을 함양한다는 관점에서, 그런 용도의 국가 예산 활용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그런 활동은 철학, 역사, 문화, 예술의 여러 분야에 연구 기회를 제공하여 인문 분야 활성화 정책으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충무공의 유물을 국보화 하는 일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지정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가 게시한 한 건의 글을 제외하면 아무도 비판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이런 참담한 일이 발생하고 있지만, 가장 기저에는 사상의 뿌리가 지탱하는 힘을 잃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무관심과 물질적(돈) 요소와 가벼운 즐거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적 기풍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줄기에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교육정책과 교육방식이 뿌리 깊게 우리 국민 사상의 틀을 경직되고 얕게 만들어 좀 먹고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비판이나 질문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화와 이권이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강력한 민원을 제기하기 바쁜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올바른 대화와 토론, 타협을 통한 점진적 개선보다 혁명적 개선을 요구하고,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무엇을 이룬 것 같은 착각속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기 쉽습니다. 크게 바꾸는 일보다 작게 시작하고, 조금씩 변화를 이끌어내는 여유가 필요한 시대에 도래했습니다.
문화재청이 (상위/국민) 민원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투명하게 선정하고 당당하게 관리해야 할 국보 선정 과정을 최대한 간략하고 흐릿하게 만들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개한 설명은 1.5쪽짜리 간단한 요약의 글로 최소화하여, 국민들의 알 권리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많은 내용을 제시하면 발생할 수 있는 민원과 오해, 불편한 사항을 방지하기 위한 행정 편의상 효율화를 기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상세 내역 제시를 요구하면 역사적 의의와 가치, 기술적 검증의 사항은 이미 학계에서 검증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의 반응이 국민을 대하는 주된 태도라면 곤란합니다. 상세 내역은 문화재청은 없으며 필요하면 학계에 국민 스스로 알아보라는 자세로는 곤란합니다. 학계의 누구, 어떤 논문, 어떤 근거를 갖고 그렇게 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런 방식과 문제는 교묘히 타 부서, 타인(학계)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벗을 날 수 없습니다. 전세계 어디에 내놔도 당당하고 떳떳하며 의의가 명확해야 할 유물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 필자는 상당히 의문이 듭니다.
이충무공 장검 관련, 검의 제작기법과 기술적 관점의 설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검으로 추정하는 연구 내용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위에서 제기했듯이 ‘이충무공전서’의 제작 시기와 임진왜란의 시대적 차이로 인해, 장검의 추정 년대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향후에도 적잖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머리(卷首) 부분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도독인, 령패, 참도(斬刀)/귀도(鬼道)에 대한 설명과 제1권(券之一)의 시(詩)와 잡저(雜著) 부분 등에 기재된 검의 의미에 대해 역사, 한문학자들의 비교 분석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제1권(券之一)의 잡저(雜著)에 기재된 ‘劍銘 長劍一雙分鐫。卽公筆也。今在公後孫家’ [검에 새겨 있기에, 긴 칼은 [양면] 한쌍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는 글은 즉, (이충무)공의 글씨체이다. 현재는 공 후손의 집에 있다]. 이 구절은 특히 주목해 볼 사항입니다.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은 ‘이충무공전서’의 발간 시점(1795년)은 역사적으로 임진왜란(1592년) 이후 거의 2백년이 흐른 후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사료와 전해오는 자료를 정조시대에 새로 엮고, 내용 추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검에 새겨져 이는 글씨(筆)체를 의미하는 ‘公筆也’라는 글자, 즉, 충무공의 필체에 따라 검을 새겼다고 하였지만, 실제 충무공의 필체라고 하기에는 검에 새겨진 글씨체는 너무 힘이 약하고 가련하게 보입니다. 정확히 검증하기 위해서는 필체 감정 한문학자가 필요할 듯합니다.
‘公筆也’의 ‘公’이라는 글자를 착안하면, 사후 내려진 존칭이라는 점에서도 표현이 시점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물론, 2백년 후 사람들이 쓴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公’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 있지만, 역사적 시점을 고려한 명확한 기록이라면, 정헌대부(正憲大夫) 또는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정도의 명칭이 더 적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백년 후, 정조시대에 전해 들은 사항과 문헌을 기반으로 추대하여 작성하는 상황이라, 관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한계점을 내포한 상황에서 1792년의 기록과 159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 검에 새겨진 글자가 일치한다고 동일한 검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시간과 공간적 좌표 연결에 임의성이 너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검을 무척 숭배하는 일본인을 역사적 흐름에 끼워 넣으면, 이충무공을 숭배하는 일본인에 의해 검이 제작되어 해당 문구를 새겨 넣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충무공의 유물이 남아 있었다면, 일제 침략시기에 약탈해 가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습니다. 약탈해간 후, 대리 유물을 제작해 넘겨주었을 가능성 또한 100%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1%라도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에 이충무공의 검에 대한 역사적 검증은 한국 단독이 아니라 일본과 같이 진행을 제의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공식화된 연구를 통해 한국의 철강 연구소와 일본의 제철 연구소가 합동으로 검의 일부(1g이라도) 시료를 추출해 철의 성분 분석을 통해 제조 연대를 추출할 수 있다면, 공신력이 배가 될 것입니다. [필자는 금속학자가 아니므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맡긴다.] 일본을 이와 같은 연구에 같이 참여시키는 일은 몇 가지 포석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이 섣불리 동참하겠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방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접근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도검 제작 연대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면, 임진왜란 기간에 일본의 것을 배워 제작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적으로 그런 기법을 활용해 도검을 제작했음을 증빙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필자가 연구하는 철학적 관점에서는 지난번 게시한 글에서 암시했듯이 검을 국보로 지정하는 일은 국민의 마음과 정서에 날카로움과 두려움을 심는 일에 해당합니다.
충무공이 기술했다는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 2면의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이라는 글귀는 그 자체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공자의 철학 논어 11.1~11.3구절의 방법론을 활용해서 문화재청의 국보지정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1.1구절에서 다루는 방법론은 선진(先進)과 후진(後進)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자(孔子)는 선진(先進)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이 국보를 지정하는 방법이 과연 선진(先進)화된 방법인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필자가 투명성과 의의에 대한 공개 및 연구를 촉구하는 이유는 기존의 것을 답보하고, 정보를 투명하지 않게 다루며, 의의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후진(後進)성이 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드리는 제언입니다.
벌써부터 칼의 힘이 두려워 아무도 문화재청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이를 추진 요청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칼과 보이지 않는 힘에 벌벌 떠는 모습입니다. 아무도 이 유물의 국보 등록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습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진 후진적 모습입니다. 물질적 요소와 사치와 향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문화적 요소의 가치와 의의를 찾지는 않습니다. 전통과 역사, 정체성을 올바로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진심으로 이충무공을 추모하고 기리는 의미라면, ‘이충무공전서’를 먼저 국보화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방대한 기록과 충무공의 가치와 의의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노력을 통해 국가를 올바르게 세우려는 정조의 혜안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논어 11.1 구절에서 공자가 선진(先進)의 길, 즉, 야인(野人)의 길을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기존의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후진성(後進性)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따라야 할 사항이라고 언급한 것은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후진(後進)적, 즉, 보수적 접근을 취하는 성향을 언급한 것입니다. 군자에 해당하는 최상위 통치자가 칼을 들고 적극적으로 휘두르는 모습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는 야인(野人)이 되어 칼을 들어 좌충우돌하고, 신하는 납작 엎드린 보수적인 모습이 후진국의 모습입니다. 선진국과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철학 11.2절을 살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으뜸은 덕행(德行)입니다. 가장 많은 4명의 공자 제자가 이 덕목에 드러납니다. 그 다음이 언어입니다. 즉, 언론의 순기능에 해당합니다. 이충무공의 장검을 국보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언론의 모습은 정부에서 받은 내역을 1회 홍보성 기사로 실은 것이 전부입니다. 언론사의 편집, 정책국에서 과거 자사의 반대되는 기사를 찾아보고, 기사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꼬집고 싶습니다. 언론이 허수아비 홍보기관 역할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세번째 덕목이 정사(政事)다. 이는 공무 수행 과정에서 효율성과 적절성을 의미합니다. 투명함과 올바름을 전제로 삼는 덕목입니다. 정사(政事)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덕(德)행과 언어(言)의 투명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문화와 학문이 쌓이고 선진(先進)된 문화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충무공 장검 국보 지정으로 국민들에게 어떤 덕(德)이 베풀어지는지 가장 먼저 살펴볼 일입니다. 일부 집단의 이익과 편리를 위한 일은 아닌지, 그런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볼 사항입니다.
11.3구절의 방법론을 활용하면 장검에 새겨져 있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2면의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구절을 해석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2개의 구절 모두 앞 4글자는 지시적 언어, 뒤 4글자는 감각적 언어를 대구로 활용하고 있다.
참도와 외관과 길이가 거의 유사한 이 장도의 사용처 및 의의는 지휘관에게 부여하는 사명이자, 상징성을 나타내는 검(劒)입니다. 지휘관에게는 두가지의 사명이 동시에 내려집니다. 아군의 군기와 명령 체계를 가다듬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일(强軍)과 그 군령을 바탕으로 적을 소탕하는 일(戰勝)입니다. 앞의 구절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 칼을 들어 하늘에 맹세하니 강과 산의 빛이 모두 변하여 움직인다 관련, 비록 전쟁을 주업으로 삼던 군인이 아닌 서민들이 많이 포함된 군대이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경우 90cm 남짓 칼을 들고 하늘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니, 국토의 강산(의 모든 군인이)이 모두 서릿발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왜적에 대응한다는 강군(强軍)의 의미입니다. 뒷면에 새겨진 ‘一揮掃蕩 血染山河’ 그런 군인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러 적을 소탕하면, 적의 피로 산하를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충무공은 거북선 제작과 학익진 및 해류를 활용한 유리한 전투를 통한 승리로 유명합니다. 그 이면에는 군대를 활용한 철저한 전쟁 준비와 계략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충무공의 정신 깊은 바탕에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충무공 본인의 기개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겨 넣은 문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들은 그 기개와 마음 자세를 자랑삼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명이 친절하지 않으니, 그런 의미를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짧은 지시적 언어와 감각적 언어의 조합을 해석할 때에는 시대 상황과 언어를 말하는 자와 실제 행위자를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대략 해석하는 경우, 자칫 읽는 사람의 선입견에 기초하여 의도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위 구절도 많은 사람들이 이충무공의 뛰어난 무예를 상상하며, 사무라이 같이 검을 잘 쓰는 장군의 다짐과 기개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런 측면보다 국가와 국민과 전장터에 나가는 군인에 대한 자애심과 비장함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명량(최민식 주연)에서 보면, 군율을 어줍게 여기고 왜군에 대한 대비에 소홀한 부하를 단칼에 목 베는(斬首) 장면이 있습니다. 이 행위에는 단순히 전쟁을 이기기 위한 군령을 바로잡는 일을 넘어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깊은 철학과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수군통제사 지휘관에게 부여되는 참도(斬刀)가 지니는 의의입니다.
이충무공 혼자서 하늘에 서약하고 맹세해봐야 왜적을 이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국가를 구하라는 지휘관 군령을 받들어, 모든 군인의 마음을 굳게 하여 하나로 움직일 때 전쟁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문화재청에서 위 글귀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한 언어, ‘시(詩)구’라는 용어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시(詩)와 수군지휘관이 전란 중에 왕의 명을 받들어 긴 칼에 다짐을 새긴 문구는 엄연히 다릅니다. 시(詩)라고 표현하고, 의미를 정확히 아는지 모르는지, 설명한 간략한 해석은 당시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왜적을 무찌르고자 한 절대절명 위기와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충무공 혼자만의 감상적 언어로 문구로 폄하시키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이런 형태의 설명을 지속하고 고집한다면, 앞으로 자라나는 학생들이 칼의 두려움과 칼(힘)이라도 둘러차면 사무라이처럼 무모한 기개만 키우는 교육이 되지 않을까 심각하게 염려됩니다.
이글을 읽는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있다면 누구라도 필자의 의견, 문화재청의 의견을 질타하고 개진하여 건전한 토론과 제의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국가와 국민에게 덕(德)을 이루는 언(言)어, 언론의 힘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공자(孔子)가 제시한 논어(論語) 방법론이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법론보다 철학적 관점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상의 뿌리로 이루고자 한다면 무기를 감추는 지혜((藏武仲之知)가 필요합니다. 칼이나 힘은 전시(戰時) 같은 난세(亂世)에 필요한 도구임을 강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以杖荷蓧, 遇丈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