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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기 태양, 왕세자의 책봉 의식
작성일
2010-03-0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210




왕의 성장, 왕세자 책봉

어린 원자가 자라나서 나이가 차면 선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된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冊封되는 의례를 책례冊禮라고 하였으며, 왕세자 책봉을 준비하는 임시 기구인 책례도감冊禮都監이 구성되었다. 책례도감에서는 책봉에 필요한 의장儀仗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편찬하였다. 정조와 같이 왕세손으로 책봉되면 『왕세손책례도감의궤王世孫冊禮都監儀軌』가 만들어졌다. 왕세자 책봉 의식은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를 결정하는 행사였으므로 국왕이 공식 예복인 면복冕服을 입고 정전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며, 책봉된 왕세자나 왕세손은 상징물로 죽책竹冊과 옥인玉印을 받았다. 『중종실록』에는 “세자의 나이가 여덟 살이 되어야 책봉했던 것은 시선視膳(왕이 들 수라를 살펴봄), 문안問安, 입학의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고 하여 여덟 살 무렵에 책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책례도감의궤』는 도청의궤, 일방의궤, 이방의궤, 삼방의궤 등으로 구성되었다. 도청의궤에는 왕세자 책봉과 관련한 각 문서를 모은 것이다. 일방一房에서는 죽책을 담당한 내용과 상의원에서 담당한 왕세자의 복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방二房에서는 옥인과 관련된 기록을, 삼방三房에서는 의식에 쓰이는 기물과 의장을 담당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왕세자의 책봉은 신하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원자의 나이와 학문이 세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을 왕에게 아뢰고 왕은 새 봄의 좋은 날을 가려 세자의 책례를 거행하였다. 책례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임명서를 수여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세자의 임명서는 죽책문竹冊文이라 하였다. 요즈음 임명장은 대개 종이를 쓰지만 당시에는 대나무에 임명 사실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죽책문이라 하였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대나무에 글을 써 온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문서는 옥으로 만든 책에다 써서 올렸다. 이를 옥책문玉冊文이라 하였는데, 왕세자나 왕세자빈에게 올리는 죽책문 보다는 한 단계 격이 높았다.

 

세자 책봉의 이모저모

적장자 세습이 원칙인 조선시대에 왕비 소생의 장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에 불과하다. 오히려 적장자로서 세자로 책봉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가 7명이나 되었다. 덕종(세조의 장자, 성종의 아버지), 순회세자(명조의 장자), 소현세자(인조의 장자), 효명세자(익종, 순조의 장자), 양녕대군(태종의 장자), 연산군의 장자, 광해군의 장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특별히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경우도 있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마지막 왕인 순종은 책봉 당시 나이가 2세였다. 영조의 장남이었던 효장세자가 10세에 요절 한 후, 영조가 42세 되던 해에 낳은 귀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당하였다. 경종과 문효세자(정조의 장남)는 3세, 효명세자는 4세, 숙종과 효장세자는 7세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반면, 순조는 11세, 소현세자는 1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가장 늦은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인물은 정종으로 43세에 책봉되었다. 태종 역시 34세에 책봉되었는데, 이것은 왕자의 난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책례와 더불어 조선의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 때문에 그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 의례가 있었다. 왕세자 관련 대표적인 통과의례로는 책봉, 입학, 관례, 가례가 있다. 이들 의례를 거쳐 왕세자는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최종의 목표인 국왕의 직위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게 했다. 차기 왕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친 왕세자. 그러나 왕으로서의 즉위 시기는 일정치 않았다. 선왕의 수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숙종처럼 왕세자로 있다가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왕도 있었지만, 문종처럼 37세의 늦은 나이로 즉위한 왕도 있었다.


숙종의 왕세자 책봉 엿보기

조선시대 왕세자 책봉 의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숙종의 책봉 의식을 따라가 보았다. 1667년(현종 8)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 태어난 원자(후의 숙종:1661~1720)는 7세가 되던 해 관례를 행한 후 1월 2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 날 세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거둥 하나 하나가 예의에 맞지 않음이 없고, 영특한 자태와 덕성스러움이 마치 어른처럼 엄연하여 뜰을 가득 메운 신하들이 모두 탄복하여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책봉례를 위해 거론된 중요한 사항은 두 가지로, 원자의 이름과 책례 복색에 관한 것이었다. 원자의 이름은 왕세자 책례 때 반드시 이름을 들어 종묘에 고하는 예가 있으므로 정해야 했다. 논란 끝에 원자의 이름은 돈焞으로 결정되었다. 책례는 1667년 1월 22일 인정전에서 오시午時(11시~13시)에 행해졌다. 세자는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인정문 동협문을 거쳐 동쪽 뜰에 이르러 자리로 나아갔다. 현종은 책례교문冊禮敎文을 발표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나는 생각건대, 세자를 세워 적통을 수립하는 것은 종조宗를 계승하기 위함이요, 지위를 정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기대를 묶어 놓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중하게 여겼던 일이니 어찌 어리다고 해서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옛 법을 따라 삼가 아름다운 식전을 펼친다. 아, 너 원자는 나면서부터 효경孝敬을 알았고 자질도 총명하여 행동거지가 자연히 절도에 맞았으며 단정하고 영특한 모습은 마치 성인成人과 같이 늠름하였다. 학업이 이미 상당한 문리에 이르렀으며 덕성과 국량은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주周나라의 교육은 반드시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을 먼저 했으며, 한漢나라의 빈틈없는 의절에 어찌 세자를 미리 세우는 것을 늦추었겠는가. 이미 훌륭한 소문이 일찍이 전파되었으니 마땅히 책호를 하루속히 정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에 세자를 정하고 이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이어 현종은 면복을 갖추어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百官의 하례를 받았다. 왕세자가 된 숙종은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인정전 뜰에 나아와 사례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옷감)를 올렸다. 세자를 책봉하는 경사를 맞아 현종은 백성들과 그 기쁨을 함께 하였다. 서울에서 별시別試를 실시하여 강경講經은 제외하고 3곳으로 나누어 각 200명을 뽑도록 하였으며, 대사면령大赦免令을 중외에 반포하여 각도에 정배되어 있는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3월 20일에는 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할 때의 노고를 치하하여 책례도감 도제조였던 영의정 정태화 등에게 상을 내렸다. 숙종은 7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4세에 왕이 되었으니 짧은 세자 시절을 경험하고 왕에 오른 운이 좋은(?) 왕이었다. 그리고 현종의 기대 대로 영조, 정조 시대 조선의 정치, 문화중흥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글·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사진·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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