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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술국치를 기억하자
작성일
2010-01-1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268




빼앗긴 나라, 빼앗긴 삶

우리 민족은 1910년 일제에 의해 병탄당하여 5천년 역사상 유례없는 이민족의 완전 식민지가 되었다. 과거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하면서 민족의 주권과 고유의 문화를 계승해 왔다. 하지만 경술국치는 달랐다. 일제에게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식민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당한 온갖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수탈, 그리고 문화적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35년간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이른바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식민수탈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자행되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가혹한 경제적 핍박 아래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고, 또 민족사가 왜곡되고 전통 문화가 파괴되는 불행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사학이 갖는 주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지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비추는 빛이라고도 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경술국치가 갖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경술국치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국제정세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19세기는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으로 무장한 서국 제국주의 침탈을 막아내기 위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혼신의 힘을 쏟았다.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며 안으로는 근대화에 심혈을 경주했지만 그 역사는 달랐다.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중적인 침략을 받아 식민지나 다름없는 반半식민지 국가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올랐다.



한국의 비극은 서구 세력과 함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침략, 그리고 종주권을 주장하는 봉건 국가인 청나라의 간섭을 동시에 받았다는 데 있었다. 국제정세에 둔감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다 근대화의 기회를 놓친 데다가 일제는 물론 서구세력의 침탈과 청나라의 간섭을 동시에 받았으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침략 야욕을 간파하지 못하고, 심지어 일제를 한국 독립과 근대화의 후원자로 인식한 둔감한 정세 파악이 문제였다. 특히 러일전쟁 시기에 태프트·카츠라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포츠머드 강화조약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열강 간의 비밀 거래와 국제정세 파악에 둔감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이준 열사를 비롯한 헤이그특사의 피 끓는 호소도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는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근대화는 각계각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할지라도 외세에 대응하는 자세는 거족적인 대동단결이 필요하다. 그래야 투쟁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제 침략세력에 대한 대응자세는 매우 분열적이었다. 서구식 근대화에 경도된 나머지 외세 의존적인 근대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내부의 반발과 갈등을 초래한 사실도 여러 차례 있었다. 반일 동학농민전쟁 시기에는 집권층과 농민대중이 극열하게 대립하였고, 전기 의병전쟁 시기에는 유생층과 개화파의 민족운동 노선이 갈리었다. 유생층은 위정척사를 내세우며 반외세 무장투쟁에 나섰지만, 개화파는 일본식 근대화 노선에 함몰되어 의병전쟁을 도외시한 것이다. 후기 의병전쟁 시기에 들어 유생층과 해산군인, 그리고 평민층이 광범위하게 반일 민족전선을 형성하였지만, 이때에도 개화파는 애국계몽운동에 치중하여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지 않았다.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루지 못해 적전분열 양상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일제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셋째는 일제의 교활한 침략 술책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개항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항상 침략의 촉수를 감추고 자신을 한국 독립의 지지자는 물론 근대화의 후원자로 포장하였다. 예컨대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임을 내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마음을 잡고, 1894년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표방하며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갑오내각의 성립을 지원하였다. 나아가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이 같이 일제는 항상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팔며 침략전쟁을 호도하고, 러일전쟁 직후‘을사조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결국에는 이른바‘한일합방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와 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경술국치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 근대적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역동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 물론 단일 민족으로 이민족과의 차별성은 고조선으로부터 생성되어 내려왔지만,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봉건적 민족정체성이 아니라 근대적 민족정체성이 확립하되어 갔던 것이다. 이 결과 3·1운동 직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를 청산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제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각기 분류하던 한말 구국운동이 경술국치를 계기로 발전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단순히 민족운동 노선의 합류만이 아니라 운동을 주도한 주체세력의 통합으로까지 진행되었다. 이 같은 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은 남녀노소는 물론 종교와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3·1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나아가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은 사회 계층별, 운동 이념과 노선별, 지역별로 분화 발전해 가면서 끊임없이 증폭되었다. 이 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통해 발휘된 민족의 역동성이 바로 광복 이후 한국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의 의미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 전의 경술국치를 회고하면서 과거 역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지난 세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치욕의 역사를 딛고 피로써 독립운동의 역사를 써가며 민족의 미래를 열어간 애국선열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민족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개항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놓치고 말았던 여러 요소들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지난 역사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이고, 나아가 미래의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글·김주현  독립기념관장   
사진·눈빛출판(한일병합사 1875-1945, 신기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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