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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 일제시대 문화재 수난사를 되새기다(2)
작성일
2005-07-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677



태실전경(왕태실)
<태실전경(왕태실)>

조선시대 태실의 의미
태실(胎室)이란 왕실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인정되어 태아가 출산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는데,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 하여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태실은 풍수지리사상과 산신숭배신앙이 더하여져 명산에 묻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태를 보관하는 태실(胎室)은 대개 태옹(胎甕)이라 불리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봉해질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봉이란 계란형의 지표 높이 50∼100미터정도 되는 야산을 골라 그 정상에 태를 매장하고 아래에 재실을 지은 공간이다. 태봉은 산 위에 석물로 안치하는데, 석물은 원형이고 아래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봉에 화재가 났다 하여 군수를 좌천했다는 기록과 태봉수호를 소홀히 한 이유로 지방관이 처벌을 받았던 기록이 있고, <해동지도>나 1872년 <군현지도>와 같은 조선시대 지도 대부분에 태봉이 그려진 사례를 보아 조선왕실이 태봉을 매우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태를 신성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관한 기록들을 모아 의궤를 편찬하였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정종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正宗大王胎室石欄干造排儀軌:1801년)>,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1809년)> 등 태실 관련 의궤에는 왕실의 태를 보관하고 태실 주변에 각종 석물을 배치한 기록들이 나타나 있어서, 조선왕실의 장태(藏胎)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태실이 자기 고향에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이 승격되기도 하였다. 왕실의 뿌리가 고향에 정착함으로써 왕실과의 일체감을 느꼈던 것이다. 현재에도 전국에는 태봉리, 태봉산, 태장동 등의 명칭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지역에 태실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처럼 신성시된 태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곳에 터를 잡았다. 왕실의 태를 묻은 태봉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산재하는 까닭은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면 어디든 갔기 때문이다. 태봉지로 선정된 곳은 대개 백두대간의 지맥이 명당을 이루는 곳이었다. 세종대왕의 왕자 19명의 태실이 함께 모여 있는 성주군 원항면 선석산의 경우도 백두대간의 지맥이 뻗어 나온 곳에 위치해 있다. 왕자녀들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태실은 조선시대의 각 지도마다 표시될 만큼 그 의미가 컸다. 또한 태실에는 각종 석물을 배치하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태실이 완성된 후에는 사후관리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금표로 지정된 지역에서 벌목, 채석, 개간을 하는 일은 엄격히 규제되고 곧바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실의 정기 차단, 일제의 태실 옮기기
그런데 현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에는 조선왕실의 태실 53위(왕의 태실 21위, 공주 및 왕자의 태실 32위)가 함께 모아져 있다. 전국 각지에 산재했던 태실이 이처럼 한 곳에 모여진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조선왕실의 정기를 차단하려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관련이 깊다.
   1929년 3월 <동아일보>의 기록에 의하면 “이왕직(李王職)의 주관 하에 39위의 태실을 서삼릉에 옮겼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왕직은 조선 멸망 후 조선왕실의 살림살이를 위해 설치된 부서로, 독자적인 실권 없이 총독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이왕직 주도 하에 태실이 옮겨진 것은 결국 일제 총독부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제는 왕실과 지역민의 연결고리가 되는 태실을 없앰으로써 조선인들이 조선왕실을 생각할 여지를 아예 없앤 것이다. 또한 태실이 대부분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 터를 차지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실제로 원래 태실이 있던 자리에 총독부 유력인사의 무덤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게다가 서삼릉에 옮겨진 공동 태실은 일본 천황에게 참배하는 신사의 모습을 띠게 함으로써 철저히 식민통치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서삼릉에 옮겨진 조선왕실의 공동 태실은 원래의 석물이나 비석은 없는 상태로 일(日)자 모양으로 둘러친 담 속에 조성되었다. 일제는 식민지배가 가속화되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국에 산재한 명당 터를 확보하고 조선왕실과 백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려는 의도에서 특별한 기준도 없이 전국의 태실을 서울 근교로 옮겨와 서삼릉에 일괄적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 태실의 상당수가 도굴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태를 묻은 항아리가 국보급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도굴되었다고 주장한 월산대군 태실의 경우, 이 곳에 묻었던 태항아리가 일본인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드러나 일제가 도굴했음을 확증하고 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왕실의 정기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는 태실까지 말살하면서 그들의 식민통치를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태실의 비석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 이 태실이 옮겨왔는지가 비문에 새겨져 있는데, 경남 사천, 경북 성주 등 전국에서 이 태실이 옮겨왔음이 기록되어 있다. 태실의 원소재지는 경북 16, 충남 11, 충북 5, 경기 5, 강원 5, 전북 2, 경남 2, 황해도 1, 창덕궁 후원 4곳 등 주로 삼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연대는 거의가 지워져 있어서 정확하게 이 곳에 옮겨 온 연대는 밝힐 수 없다. 다행히 후궁의 태실에 미처 지우지 못한 소화, 명치 등 일본의 연호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태실이 일제시대에 이 곳에 옮겨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신성시되면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았던 조선왕실의 태실은 식민통치 시절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삼릉 한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제라도 조선왕실 태실의 존재와 역사성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바람직한 공간으로 태실을 옮기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민족정기의 보전과 문화재 보호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병주 /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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