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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원기계공업단지 중심에 우뚝 서있는 ‘사적 제240호 창원 성산 패총’
작성일
2016-07-0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042

창원기계공업단지 중심에 우뚝 서있는 ‘사적 제240호 창원 성산 패총’ 해발 49m 야트막한 구릉에 공단으로 둘러싸여 홀로 서있는 창원 성산 패총은 사적 제240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패총으로 유명하지만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이 확인되었다. 무엇보다 기계공업단지 건설에 부합하는 고대 야철지(冶鐵址)가 확인되어 당시 조사 성과 중 최대로 손꼽힌다. 성산 패총 ©문화재청 발굴 현장 ©김주용

고대 창원의 중심지 성산유적

성산유적은 광활한 창원기계공업단지 가운데 성산이라는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성산유적의 남쪽에는 불모산에서 발원하여 2㎞ 정도 떨어진 남해안으로 연결되는 남천이 있으며 북쪽으로 가음정동 유적과 연결되어 있다. 1973년 11월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공사 중 패각과 토기편들이 노출되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1974년에 긴급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91년 태풍에 유실된 부분을 긴급 발굴한 바 있다.

발굴조사결과 패총을 비롯하여 산성과 야철지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최하층에서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성산패총은 청동기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복합유적임이 밝혀졌다.

패총은 성산의 여러 골짜기를 조개껍데기로 메우면서 형성되었는데, 이중에서 동쪽과 서남쪽, 북쪽에 형성된 3곳의 패총만 발굴조사 되었다. 골짜기마다 패총이 존재한다는 것은 구릉 정상부에 조개껍데기를 버렸던 사람의 마을이 존재한 것을 의미한다. 추후 정상부를 조사한다면 성산마을의 전모가 확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패총에서는 물고기나 짐승 뼈, 조개껍데기 등 당시 사람들이 먹은 뒤 버려진 자연유물뿐만 아니라, 민무늬토기편, 시루, 솥모양토기, 항아리, 뚜껑, 숟가락, 잔 등의 토기류, 반달돌칼, 갈돌, 갈판, 숫돌 등의 석기류, 뼈화살촉, 찌르개, 뿔손잡이 등의 골각기를 포함한 생활유물도 확인되고 있다.

패총 바닥층에서는 야철지도 확인되었다. 이 야철지는 가야지역 제철 유적 중 사천 늑도 유적과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잔존하는 원형의 유구는 제련시설 굴뚝의 아랫부분으로 추정되며 철분 함량이 많고, 길이는 15㎝, 두께는 3.5㎝ 정도이다. 이와 연결되어 쇳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경사진 도랑 시설도 확인되었다. 패층(貝層)에서 중국 한나라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을 통해 볼때 유적의 형성시기를 대략 기원전 1세기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성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실제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석성(石城)이 확인되었다. 산성은 패총을 파내고 산세를 따라 사방을 에워싸듯이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가공하여 고른 면을 수직으로 1.5~2.7m 정도 쌓았으며 총 길이는 423m 정도 남아 있다. (축조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성의 특징이 확인되고 있으나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패총이 폐기된 이후 어느 시점에 축조되었고, 성벽조사시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621년에 주조된 당나라의 개원통보가 확인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후까지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산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 패총, 야철지, 통일신라시대 산성까지 형성되어 있는 유적으로 인근의 가음정동유적과 함께 이 일대가 청동기시대 이후 창원분지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성산유적에서 확인된 야철지, 그리고 오수전, 개원 통보와 같은 중국 화폐가 조사된 것은 인근의 다호리 유적에서 발굴된 오수전, 성운경, 철광석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창원지역이 중국과 철을 매개로 교역을 하였던 국제무역항임을 알려준다.

고대의 야철지, 기계공업단지로 재탄생

1970년대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기계공업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성산유적은 공단 조성에 가장 중요한 토취장이었고 부지의 중심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창원기계공업단지부지(4만 3천㎢)를 조성하면서 성산 패총은 공단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굴조사 된 유적이었고 다행히 보존까지 이루어져, 현재 창원공단지 내의 유일한 역사교육장으로 잘 활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성산 패총이 보존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유적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보존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건설부는 자주국방이라는 국가 최대의 목표 앞에 패총 쯤은 별 볼일 없는 유적으로 치부하였고 유적을 보존할 경우 추가 예산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업단지 조성이 1년 이상 지연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성산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결국 유적이 위치한 곳이 창원공단을 조망할 수 있는 입지조건이란 이유로 보존이 결정되었으나 사실은 성산 패총이 고대 철을 생산하는 야철지였으므로 철과 관련된 국가기계공업단지 조성과 부합되는 유적이었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창원 봉림동 유적, 현동 유적, 불모산, 반계동 유적, 여래리 유적 등 창원 일원에서 대규모 철 생산 유적이 다수 확인되었다. 이러한 철 생산 유적의 존재는 창원지역이 고대 철 생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쩌면 현재 창원이 기계공업단지의 중심기지로 발전한 것은 정말 고대사회의 철 생산과 무관하지 않은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글‧김주용(창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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