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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범의 숨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이 남다
작성일
2016-06-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833

백범의 숨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이 남다 사적 제465호 경교장 경교장은 사적지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김구 주석의 숙소’였다는 점이고, 동시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1945년 11월 23일 중국에서 환국하였다. 환국 후 1949년 6월 26일 서거할 때까지 경교장에머 물렀다. 경교장(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소재)

근대건축의 선구자, 김구 선생의 숙소

경교장은 원래 광산업자인 최창학의 집이었다. 최창학은 일제시대에 금광 등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그는 자신의 저택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서양식 건물을 지었고, 이름을 죽첨장(竹添莊)이라고 했다. 죽첨장은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였다고 하며, 『조선과 건축』(1938년 8월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최창학의 집이 김구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의 환국 문제가 대두되었다. 임시정부도 국내로 환국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국내에 있던 인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환국봉영회’, ‘대한민국임시정부개선환영회’ 등 임시정부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이 임시정부 환영을 준비하면서,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거주할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을 임시정부 주석의 숙소로 마련해 놓았으나 김구가 왕실과 관련된 곳을 사용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봉영회를 주도하고 있던 김석황이 평소 알고 지내던 최창학을 찾아가 그의 저택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로써 최창학의 집이 주석의 숙소로 결정되었다. 부주석의 숙소는 삼청장으로, 요인들의 숙소는 한미호텔로 정해졌다. 운현궁은 여당으로 역할을 하던 한국독립당에서 사용하기로 하였고, 국회 역할을 하던 임시의정원은 창덕궁 인정전에 사무소를 마련하였다.

국내 인사들이 환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은 곧바로 환국할 수 없었다. 교통편 등 여러 문제들도 있었지만, 미국이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중경에서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두 달이 훨씬 지난 11월 5일에서야 상해로 이동하였다. 상해에서 머물다가 두 차례로 나뉘어 환국하게 되었다.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한 제1진은 11월 23일 환국하였고, 국무위원 대부분은 제2진으로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환국한 김구는 곧바로 죽첨장으로 안내되었다. 김구의 비서로 함께 환국한 선우진의 회고에 의하면, 김포 비행장에 내렸을 때 미군에서 준비한 세단 2대와 지프 10여 대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김구와 김규식은 각각 세단을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고 한다. 죽첨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김구는 며느리 안미생, 그리고 최측근인 엄항섭의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이로써 죽첨장은 주석 김구의 숙소가 되었다. 김구는 죽첨장의 이름을 바꾸었다. 죽첨장은 일본식 이름이라며, 서대문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라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고 불렀다.

경교장, 임시정부청사 활동의 중심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정부로서 활동한 곳이 바로 경교장이었다. 제1진에 이어 제2진이 환국하자 곧바로 모임을 가졌다. 12월 3일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도 참석하였다. 『자유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이들의 모임을 ‘전 각료가 모인 환국 후 최초의 국무회의’라는 내용으로 보도하였다. 임시정부가 경교장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흔히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였다는 점 때문에,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끝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내에서도 ‘정부’로 활동하였다. 경교장에 모여 계속 국무회의를 개최하였고, 당시 사진도 남아 있다. 복원을 추진하면서 서울시 직원들이 미국의 『LIFE』라는 잡지에 실린 국무회의 사진을 여러장 찾아냈다. 이 사진들은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임시정부가 반탁운동을 추진한 곳도 경교장이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정부는 즉각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 이에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경교장에서 각 정당·단체·언론계 대표들과 함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경교장은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공간이었고, 중심지이기도 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가 서거하였다. 이후 경교장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최창학이 사용하다가 자유중국대사관저로, 6·25전쟁 때에는 미군특수부대 주둔지로, 월남대사관저로, 그리고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 삼성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경교장의 원래 모습을 되살렸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사용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전시실을 마련해 놓았다.

글‧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 사진‧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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