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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공동 빌딩 사이, 역사의 현장 사적 제157호 환구단
작성일
2016-02-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265

소공동 빌딩 사이, 역사의 현장 사적 제157호 환구단 고층건물이 즐비한 서울 시내 한복판, 팔각형 3층 건물이 숨어있듯 자리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시설인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이다. 마치 웨스턴조선호텔에 딸린 정원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황궁우 출입문 격인 삼문과 고종 즉위 40년 기념물인 석고, 최근에 복원한 환구단의 정문만이 남아 그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01 황궁우.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는 천신을 비롯한 여러 신의 위패를 봉인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환구단’ 축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성립과 출발을 같이했다. 19세기 말 조선은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발맞추지 못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1895년 일본에 의해 왕비 민씨(명성황후)가 피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그러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되자, 고종은 1년 만인 1897년 2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이 환궁하자 이제는 조선에서도 황제를 칭하자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이에 고종은 먼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고 이를 반포하는 행사를 치렀다. 그런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시설을 만들자는 주장이 대두되어 환구단의 축조에 나섰다. 환구단의 후보지로 선택된 곳은 경운궁 가까이에 있는 소공동의 남별궁 터였다. 임진왜란 이후 여기에 중국 사신들이 머물게 되면서 남별궁은 중국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게 되었다. 환구단의 위치를 남별궁 터로 정한 것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뜻있는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국 황제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조선에서 이를 준비하는 것은,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자주독립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환구단의 축조는 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불과 10일 만에 마무리했다. 물론 이는 제천 의식을 위한 원형의 제단만을 완성한 것이었다. 3층의 원형 제단인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는데, 이후 중앙 상부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칠한 원추형의 지붕을 설치했다.

급하게 환구단의 제단이 마련된 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날 백성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 환호했다. 황제 즉위식 다음 날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한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1899년에 황궁우를 세웠는데, 황궁우는 황천상제, 즉 천신을 비롯해 지신, 그리고 해신과 달신, 별신등 여러 신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환구단 시설은 1903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완성된 환구단은 3층의 원형 제단, 이를 둘러싼 사각형의 담장으로 구성된 환구단 영역, 아치형의 삼문을 통해 환구단과 접해있으며 원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궁우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같은 구조는 현재 중국의 베이징에 있는 천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처럼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출발점이 된 의미 있는 장소다. 다만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해야 할 대한제국이 전근대적인 제사시설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했는지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02 석조 삼문. 환구단의 제단과 황궁우 사이에 만든 문으로 황제의 위용을 자랑하듯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이 조각되어 있다.

 

오늘날의 환구단이 있기까지!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환구단을 조선 총독부 소관으로 이전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치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13년 시정 5년 기념물 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기로 계획하면서, 내외국인을 숙박시킬 장소로 호텔을 신축할 것을 계획했다. 그 장소가 된 곳이 바로 환구단의 제단이 있던 자리였다. 일제는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세웠다. 환구단 자리에 호텔을 세운 것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장소를 없앰으로써 민족의 주체성을 억누르기 위한 의도였다. 이는 이후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과 같은 목적을 가진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남아있던 황궁우 영역은 호텔의 정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1960년대 후반 철도호텔을 헐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이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환구단의 정문과 재실 등 부속건물은 해체되어 판매되거나 훼손되었다. 이에 따라 고종이 즉위식을 했던 환구단의 제단은 물론 재실 등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현재 황궁우 곁에는 돌북인 3개의 석고가 세워져 있다. 이 석고는 1903년 무렵 완성된 것으로 본래 환구단의 동쪽에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었으나 황궁우 곁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받침대와 함께 남아 있으나 시침 역할을 하는 부분이 사라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환구단의 정문이자 조선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문이 우이동의 그린파크 호텔에서 발견되어 복원되었으나, 제자리가 아닌 시청 광장 쪽에 복원되었다.

자주독립국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유적인 환구단, 지금은 수리를 위해 공사 중인 그 환구단에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망국의 안타까운 상황을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백유선(보성중학교 교사, 2001 EBS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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