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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옛 그림으로 살펴보는 풍류
작성일
2014-08-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720

옛 그림으로 살펴보는 풍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역사를 관류해온 풍류에서 우리는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표현할 수 있다. 사대부의 삶에서 거의 전부였던 학문과 현실에 두루 관여했던 풍류. 오늘날 남아있는 당대 화가들의 그림을 살펴보면 각자 생활 속에서 실현했던 풍류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풍류를 즐긴다.”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겨 마음 맞는 사람과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거나, 차분하게 앉아 좋은 차를 음미하는 것이다.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구경하기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을 읽거나 그냥 하는 일 없이 서성거리고 싶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음악을 연주하며 밖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멀리 여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팍팍한 생활을 뒤로하고 풍류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옛 그림을 살펴보면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선비들은 독서·탄금·음주·탁족은 물론 바둑을 두고 활을 쏘기도 한다. 심지어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서화(書畵)를 감상하는 사람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그림과 풍류는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기에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풍류를 만끽할 수 있다.

 

01. 이재관 〈파초선인도(芭蕉仙人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02. 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18세기, 종이에 채색ⓒ삼성미술관리움

 

삶의 철학이 깃든 그림 속 풍류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 김홍도(1745~1806 이후)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천재 화가로서 실력을 뽐냈지만, 동시에 천하가 알아주는 멋들어진 풍류객이었다. 그는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나 젓대를 연주했다. 어쩌다 그림을 팔아 큰 돈이 생겨도 살림은 거들떠보지 않고 값비싼 매화 화분을 구한 후, 술 몇 말을 사오게 하여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였다. 정교하고 엄숙하게 임금의 어진을 그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해학적으로 그려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턱이 빠지게 웃도록 만들었다.

풍류를 즐겼던 김홍도의 면모는 그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 속의 선비는 서책, 청동기, 문방구 등 여러 가지 물건에 둘러싸여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화면 왼편에는 ‘종이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언정,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은 채, 거기서 시를 읊조리며 산다네(紙窓土壁終身布衣嘯詠其中)’라는 글을 적어 놓아 그림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홍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선비도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온갖 완상품을 구비해 스스로 만족하는 생활을 즐기는 중이다.

선비의 등 뒤로는 귀한 서책이 높게 쌓여있고 여러 축의 서화 족자가 보인다. 일부러 표면에 금이 가도록 만든 중국제 가요(哥窯)자기병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자그마한 청동향로 정(鼎)과 산호와 영지버섯이 꽂혀 있는 청동제기 고(觚)가 있다. 모두 값비싼 골동품이다. 그 주변으로는 커다란 파초 잎과 그 위에 글씨를 쓰기 위한 붓과 벼루가 보인다. 앞에는 또 다른 악기 생황이 놓여있고, 칼집에서 빼낸 긴 칼이 눈길을 끈다. 오른편에는 역시나 선비의 흥을 돋아주는 술이 담긴 호리병이 놓여있다.

자세히 보면 선비는 맨발 차림을 하고 있어 격식 없는 태도를 드러낸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글 읽는 선비의 모습으로는 경망스럽다. 위대한 성인이나 종교적 신격(神格)은 종종 맨발로 그려지기에, 김홍도 그림 속의 선비는 세속으로부터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03. 이재관 〈오수도(午睡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삼성미술관리움 04. 작자미상 〈후원아집도(後園雅集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눈과 마음으로 노니는 흥취

파초 잎에 붓글씨를 쓰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운치가 있다. 보기만 해도 시원스런 큰 파초 이파리는 시든다 싶으면 이내 돌돌 말린 새 심이 삐죽하게 솟아 나온다. 당나라의 승려였던 회소(懷素)는 휘갈겨 쓰는 호방한 광초(狂草)로 유명했는데, 파초를 잔뜩 심고 그 이파리를 따다가 글씨 연습을 했다고 한다. <포의풍류도>의 주인공도 술과 음악으로 흥이 오른 후에는 붓을 집어 들고 파초 잎에 일필휘지로 글씨를 써내려 갈 것이다. 이재관(李在寬, 1783~1849 이후)의 <파초선인도(芭蕉仙人圖)> 역시 이런 풍류를 잘 표현했다. 파초 이파리는 금방 누렇게 시들고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알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서 붓을 놀리는 선비를 만나게 된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또 다른 그림 <군현(群賢)>을 보면 다섯 명의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거나 서화를 감상하면서 한가롭게 초여름 날을 즐기고 있다. 꽃나무와 야자수 아래 탁자에는 역시 골동품과 서책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술병과 찬합이 보인다. 한켠에서 동자는 찻물을 끓이고 있다. 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이렇게 여유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양반의 특권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유흥을 탐닉하고 값비싼 물건 수집에 몰두하는 사치를 부린 것은 아니다. 생각이 반듯한 사람은 그림 속 다섯 명의 선비들처럼 건전하고 품격 있는 여가활동을 즐기면서 풍류의 멋을 추구했다. 선비의 주된 일은 공부였다. 그래서 책 읽기를 농사짓는 것에 비유하고는 했다. 그만큼 독서는 힘들고 쉽지 않은 것이었고, 더운 여름날은 더욱 그러했다. 책을 읽다가 깜박 잠이 든 선비의 모습을 이재관은 <오수도(午睡圖)>에서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림 한쪽에는 “새소리 위아래서 들려오고 낮잠이 바로 쏟아진다(禽聲上下午睡初足).”라는 시구가 적혀있다. 송나라 나대경(羅大經)이 산속 은거지에서 긴 여름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묘사한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선비는 탁자에 잔뜩 쌓인 책을 뽑아 읽다가 결국 책더미에 기대어 왼발을 꼰 채 잠들었는데, 그늘 아래서도 더운지 가슴을 살짝 열어 젖혔다.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는 한 쌍의 학이 여유롭게 서있고, 바위 절벽 밑에서는 동자가 쪼그리고 앉아 찻물을 끊인다. 차를 다린 동자가 선비를 깨우면 길게 기지개를 펴고 향기로운 차 한 잔에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책을 펼 것이다.

05. 김홍도 〈군현도(群賢圖)〉, 18세기,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손창근 기탁)

 

범부의 꿈과 소망을 화폭에 옮기다

선비들이 모여 앉아 바둑을 두는 장면도 옛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바둑은 간단한 놀이지만 한 점씩 놓을 때마다 수의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정치나 병법에 빗대기도 한다. 공자도 ‘배불리 먹고 하루 종일 마음 붙일 곳이 없다면 딱한 일이니 바둑을 두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다. 따라서 바둑 두는 것은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는 것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산 속에 숨어 일생 동안 바둑을 두며 살았던 상산(商山)의 네 명의 노인들이나, 산에 나무하러 가서 신선들의 바둑 놀이에 정신이 팔려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려서 도끼자루가 썩고 말았다는 왕질(王質)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바둑은 여유로운 은자(隱者)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말 그대로 신선놀음이기도 했다. <후원아집도(後園雅集圖)>에서는 연꽃 핀 네모난 연못이 있는 후원에서 멍석을 깔아 놓고 바둑을 두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둑에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과 이들 못지않게 진지하게 구경하는 노인이 긴 담뱃대를 물고 있다. 그 옆으로는 잘 생긴 소나무 아래서 두 선비가 그림을 감상하고, 연못가에서는 동자가 낚시를 한다. 전체적으로 유유자적하는 여유로운 장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일하는 것 못지않게 잘 노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아하면서 멋스럽게 노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권력이 있다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쉽게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일에 생각이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하면서도, 뜻이 맞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려는 풍성한 마음씨가 필요한 것이다. 풍류가 담겨있는 옛 그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은 이미 자신이 그림 속의 즐거움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물며 아름다운 필치로 묘사된 작품일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글 조인수(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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