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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현대의 길목에서 늦은 밤 도시를 밝히는 오색영롱한 일루미네이션, 네온사인
작성일
2013-10-0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6424

늦은 밤 도시를 밝히는 오생영롱한 일루미네이션, 네온사인

01 1937년 조선신궁 사진첩에 수록된 서울의 야경. 언제나 우리들은 그 가늘고 긴 새벽의 유리관 전극 속으로 사라진 불의 문자 아래로 걸어간다 [송승환.시 '네온사인' 2007] '네온이 불타는 거리/ 가로등 불빛 아래서/만났던 너와나/(...)불타는 눈동자 목마른 그입술/별들도 잠이 들고' [윤수일.가요'황홀한 고백' 1989] 인간들로 넘쳐나는 도시가 인간들의 사막이다. 태양의 광휘가 사위 어가면 사람들은 또다른 불빛 사이로 사람의 온기와 스물스물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욕망을 찾아 나선다. 20세기 문명이 부여한 선명한 색상의 유혹, 거리를 가로지르며 번지는 불빛'네온사인'이다.

네온사인은 19세기 말 유리관의 내부에 가스를 채우고 강한 전압을 걸어 불빛을 내게 한 ‘가이슬러 관管’에서 비롯됐다.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이 새로운 조명기구는 구부려 제작할 수 있는 형태의 자유로움과 함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898년 발견된 네온 가스를 관에 채우자 도시의 밤거리에는 혁신이 일어났다. 네온 관의 또렷한 붉은 빛은 기존의 모든 색상을 압도했다. 아르곤의 청색, 크립톤의 핑크, 헬륨의 주황 등이 그 뒤를 이었고 이 모든 색상의 유리관은 통틀어 ‘네온사인’으로 불리게 됐다.

프랑스인 조지 클로드의 에어 리퀴드 사는 이 잠재성 많은 가스의 대량 생산에 나섰고 1910년 파리 모터쇼에서 12미터에 달하는 대형 네온관을 선보였다. 파리의 고전적 건물들이 가장 먼저 네온의 화려한 치장을 입기 시작했다. 오늘날엔 고개를 갸웃할 일이지만, 전면에 작곡가들의 석상이 즐비한 네오바로크 양식의 대표건물, 파리 오페라 극장도 처음 네온의 장식으로 치장됐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클로드가 새로 설립한 클로드 네온 사는 1923년 미국에 상륙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들어선 선명한 ‘Packard’ 글씨는 신대륙인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곧 네온사인은 신구 대륙을 걸쳐 강력한 지배력으로 사람들을 밤거리에 끌어들였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는 1920년대 후반 오늘날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이 새로운 풍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34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는 ‘네온 가두街頭 대매출 기旗 아래 한숨짓는 룸펜의 영자(影子·그림자)’라는 스케치 기사를 실었다. ‘금은 패물과 능라비단이 오색영롱한 일류미네이션(illumination)에 어울려 눈을 부시게 하고 전차소리, 자동차소리, 유행곡 레코드소리 어울려서 저문 거리를 휘몰아가지마는 바뿐 때도 한가한 이 거리의 룸펜군은 언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고?’ 당시나 지금이나 도시의 휘황한 광휘는 그 유혹에 응답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한층 커다란 소외의 상징물이었다. 네온사인이 변화시킨 거리 풍경은 지방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1935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네온싸인과 가등街燈 박탄(雹彈·우박알)에 분쇄, 신의주 일대에 내린 우박에 총 피해 이만여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날 신의주 일대에 내린 우박으로 네온사인이 깨져 큰 피해액이 발생한 것이다. 1936년 봄에는 창경원(창경궁.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이라고 격하함)에 네온등이 설치됐다. 매년 열리는 창경원 밤벚꽃놀이를 맞아 야간 관람을 위해 분수에 조명을 설치한 것이다. ‘금년도의 시설로는 춘당지春塘池에 직경 약 12메틀(미터)의 장려한 네온싸인의 분수탑을 건립하야 오채의 광파를 못 속에 비치게’ 할 것이라고 1936년 4월 25일 이 신문은 전했다.

 

02 1930년대 대구역 촬영한 야시장 풍경, 일제 강점기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인 변해갔다. 거리에는 상점들이 즐비해지고, '쇼윈도'라는 진열장도 생겼다.

그러나 당시 네온의 전성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서울에 등화관제를 실시했다. 적기 공습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구실로 들어 강력한 통제를 도입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8월 22일 동아일보는 ‘야시夜市, 불의의 수면, 네온싸인도 실색失色’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고 12월에는 상시관제가 해제됐다. 하지만 한번 어두워진 서울의 밤거리는 예전처럼 밝아지지는 않았다. 광복 후 일본 상인들이 물러가고 6·25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밝았던 1930년대 서울 거리’를 떠올렸다.

광복과 경제개발기를 맞아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약하던 네온사인이 또다시 서리를 맞은 것은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문이었다. 10월 시작된 중동전쟁이 석유전쟁으로 번지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 가격을 단번에 17%나 올렸다. 대부분의 에너지를 석유에 의존해온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한국도 고급승용차 운행금지, 접객업소 영업시간 단축에 이어 실내풀장과 네온사인도 금지대상에 포함됐다. 거리는 다시금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오늘날 수많은 네온사인 조명이 한층 선명하고 전력도 절감되는 발광다이오드(LED)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나 탄생 100년이 넘은 네온사인이 뿜어내는 독특한 색상과 분위기의 마력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네온사인은 여전히 도시의 화려함과 풍요의 상징물로 건재하다.

 

글. 유윤종 (동아일보 기자) 사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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