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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도전의 두뇌를 빌린 태종의 계미자, 그 이면에 숨은 이야기
작성일
2008-02-02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637

고려를 엎고 조선을 세웠던 혁명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문집 『삼봉집』에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置書籍鋪詩란 흔하지 않은 제목의 시가 있다. 시 앞에 서문이 붙어 있는데, 읽어볼 만하다.

「대저 선비가 아무리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서적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동방은 서적이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의 범위가 넓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 것이 오래다. 나의 간절한 바람인즉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서, 무릇 경·사·자·서書·제가·시·문과 의학·병兵·율律의 서적까지 깡그리 인쇄해내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그 서적을 구해 읽어 학문의 시기를 놓치는 한탄을 면했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모쪼록 이 일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서문에 이어 시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물어보자,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줄까?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면,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
한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적이 적어서
늘그막에 못 본 책을 얻는다 해도
읽고 나서 덮으면 이내 까먹어버린다오.
다짐해 바라노니 부디 서적포를 설치하여
후학에게 책을 널리 읽게 하고 무궁토록 전했으면.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 시렁과 들보까지 꽉 채웠네.
저들은 성盛하고 우리는 쇠했다고 어찌 한탄만 하랴?
본디 우리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께 청하노니 서적 인쇄 비용을 도우시어
모쪼록 사도斯道가 더욱 빛을 발하게 하소. 」

내용인즉 서적포를 설치하고 서적을 많이 인쇄해 보급할 수 있도록 가까운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활자를 만들어서 책을 인쇄하자는 제안이다. 동활자란 바로 금속활자다.
정도전은 왜 금속활자를 만들자 했던 것인가. 목판인쇄는 제작과 보관이 어렵고, 쉽게 닳는 단점이 있다. 거기다 목판은 단 1종의 인쇄물밖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쉽게 마모되지 않고, 책을 찍고 나면 판을 해체하여 다른 책을 또 찍을 수 있다. 다만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현재의 활자 인쇄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현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대량의 인쇄물을 얻을 수 있지만,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짧은 시간 안에 소량少量, 다종多種의 인쇄물을 얻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많은 인쇄물을 얻고 싶으면 목판으로 인쇄하였다. 정도전의 금속활자를 만들자는 제안 역시 소량, 다종의 인쇄물을 빨리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활자를 통해 혁명을 꿈꾼 정도전과 핵심인물들


정도전이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기 위해 설치하자고 제안했던 서적포는 원래 국자감國子監의 인쇄기관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시대에 서적포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없어졌을 수도 있다).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썼던 때는 1390~1392년경인데, 이때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고려의 성균관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1300년경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다. 안향(安珦, 1243~1306)은 1290년경 베이징에 있을 때 처음 성리학을 접하고 주자의 서적을 베껴 가지고 온 사람이다. 성리학을 접하니, 세상을 구제할 방법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는 귀국한 뒤 퇴락한 성균관(곧 국자감이다)을 재건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열중했다. 안향 이후 성균관은 성리학이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보급하는 기지로 변신한다.

고려 말기 성균관을 이끈 주역은 이색·정몽주·김구용·박상충·박의중·이숭인 등 이었고, 이들은 이른바 ‘신흥사대부’의 핵심이었다. 정도전 역시 공민왕 19년(1370)에 성균박사에 임명돼 위의 인물들과 함께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성균관은 어느새 사회개혁의 기지가 돼 있었고, 곧 혁명의 기지로 변신할 참이었다. 정도전은 이 동지들을 향해 서적포와 금속활자를 만들어, 불교를 성리학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의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 시렁과 들보까지 꽉 채웠네”에서, ‘윤리를 해치는 오랑캐’란 곧 불교다. 그는 서적포와 금속활자로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보급하자고 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4년(1392) 정월 조를 보면 “처음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鑄字와 서적 인쇄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1392년 1월에 서적원이 설치되고, 불과 반년 뒤인 7월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서적원은 조선의 관제官制로 그대로 옮겨간다. 서적포가 아닌 서적원이지만 금속활자와 인쇄를 관장하는 정식 관청이 새 국가에 설치된 것이니 정도전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서적원에서는 실제로 책을 찍었다. 1395년 서적원에서 찍은 책인 『대명률직해』의 중간본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책의 발문에 의하면 서찬徐贊이 조각한 글자로 인쇄했다는 것이다. 조각한 글자란 나무로 새긴 글자, 곧 금속활자가 아니라 목활자를 말한다. 서적원은 주자鑄字, 금속활자를 관장한다 했지만, 실제 보유한 것은 목활자였던 것이다. 이 사실로 금속활자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의 정적 태종의 손에 완성된 금속활자


그렇다면 누가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것인가. 정도전이 아니라 정도전의 정적政敵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든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충돌하고 정도전은 제거된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조는 정도전의 최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정도전은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 말했다.
“제발 죽이지 마시오. 한 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
소근小斤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靖安君, 太宗의 말 앞으로 갔다. 그리고 정도전이 다시 말했다.
“예전에 공이 나를 살린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소서.”
정안군이 대답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냐? 어떻게 이다지도 악한 짓을 한단 말이냐?”
이어 그의 목을 치게 하였다. 」

정도전이 말한 ‘예전’은 태조 원년인 1392년이다. 이해 3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김진양·서견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다. 그리고 혁명파의 전위였던 정도전을 예천으로 귀양 보낸다. 혁명파의 위기를 타개한 것은 이방원, 곧 태종이었다.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타살함으로써 일거에 대세를 만회한다. 정도전은 귀양에서 돌아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린다. 정도전이 예전에 나를 살려주었다고 한 말은 바로 이때 이방원의 활약을 가리킨다.
태종이 정몽주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도전은 혁명의 주역으로 복귀하지만, 그가 태종과 갈라선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세등등한 혁명의 실세 태종에게 정도전이 호의를 가졌을 리 만무하다. 그는 태조의 계비였던 강비康妃와 함께 태종을 경원시해 태종을 개국공신과 세자 책봉에서 탈락시킨다. 거기에 더해 정도전은 1398년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였다. 태종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도 물론 그 대상이 되었다. 사병을 제거하는 것은, 곧 태종의 두 팔을 꺾으려는 것과 같았다. 두 사람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정도전의 패배였다.
정도전을 죽이고 2년 뒤인 1400년 10월, 태종은 원하던 대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403년 2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정도전이 희망했던 금속활자의 제작, 곧 ‘주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관청이 설립된 것이다. 권근의 문집 『양촌집』에 주자소의 활자 제작을 기념한 「주자발鑄字跋」이란 글이 실려 있다.

「영락 원년(태종 3, 1403) 봄 2월 전하께서 좌우 신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전적을 널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치를 캐보고 마음을 바로잡아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어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전해지고, 판각板刻한 책은 쉽게 훼손된다. 게다가 천하의 책들을 판각으로는 다 출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구리를 녹여 활자를 만들고 책을 얻으면 얻는 족족 반드시 인쇄하여 책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니, 정말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이 사업에 드는 비용을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내가 종친·훈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비용을 댄다면, 아마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목판인쇄보다 금속활자가 마모성이 없어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많은 종수의 책을 인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태종은 책이야말로 유교의 정치이념을 담보할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논리를 편다. 어디서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정도전은 죽였지만, 그의 생각은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빌려왔던 것이다.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라 명령한 그 달 19일부터 『시경』, 『서경』, 『좌전』의 글자를 본으로 삼아 몇 달 안에 수십 만 자의 활자를 제작했다. 권근의 『주자발』이 11월 1일 쓰인 것으로 보아 9개월 만에 활자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활자를 학계에서는 계미년에 만든 활자라 해서 ‘계미자癸未字’라 부른다. 계미자로 인쇄된 책은 여럿인데, 현재 전하는 책으로는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국보 제148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국보 제149호), 『송조표전총류宋朝表箋總類』(국보 제150호) 등이 있다. 또 『통감속편通鑑續編』(국보 제283호)과 같은 책은, 본문은 경자자(세종 2년에 만든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지만, 서문과 목록, 서례序例는 계미자로 인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계미자로 인쇄된 책을 팔았다는 것인데, 『태종실록』 10년 2월 7일조에 “비로소 주자소에 명하여 서적을 인쇄해 팔게 했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이는 계미자가 사대부에게 지식을 보급하고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혁명가 정도전은 인간의 대뇌에서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설치할 것을 꿈꾸었다. 그 수단으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종수의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금속활자는 주로 불경을 인쇄하고 있었으니, 정도전은 적의 무기로 적을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금속활자를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 정도전을 죽인 태종은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계미자를 만들었고, 세종은 다시 그것을 개량하여 갑인자 등의 활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로 막대한 종수의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 책으로 성리학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대부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조선을 5백 년 동안 지배했다. 혁명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도전이 구상했던 금속활자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글_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제공_ 서울대학교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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