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종묘의 대문, 외대문
- 작성일
- 2024-01-03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355
신의 영역과 인간 영역의 경계
외대문을 경계로 인간의 공간과 신이 된 왕과 왕비의 공간으로 나뉜다. 조선시대 법령서인 『속대전』이나 『대전통편』 등에 외대문은 궁궐의 문과 같이 숙위할 것으로 정해져 있다.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례를 기록한 『부묘도감의궤』를 보면 왕은 외대문 앞에서 가마를 바꾸어 탄다. 바깥에서는 연(輦)을 타고 오다가 외대문 앞에서 여(輿)로 갈아탄다. 보통 연은 왕이 타는 가마이고 여는 그 이하의 사람들이 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왕도 여를 타며 이는 이동의 편의성을 위함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왕이 궁궐 밖으로 거둥했다가 돌아왔을 때 가마를 바꾸어 타는 곳은 궁궐 정문이 아니라 궁궐 안 정전 문 앞이다. 왕이 종묘 외대문 앞에서 가마를 바꾸어 타는 것은 조상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행동으로도 볼 수 있다.1) 외대문은 궁궐 대문과 같은 위상을 지니면서도 더욱 엄숙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 안소정, 『영조대 종묘 외대문 내외 공간의 행례』, 『서울과 역사』 104, 2020.
소박하지만 위엄 있는 외관
위상은 결코 낮지 않으나 외대문의 모습은 다른 궁궐 문에 비해 매우 소박하다. 우선 규모가 궁궐 대문에 비해 작다. 3단의 계단을 오르도록 장대석 기단을 쌓았고, 세 칸의 문을 세워 그 위에 소박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추녀마루에 5개의 잡상을 놓았다. 문 모양이 특이한데 상부의 절반가량이 홍살문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 판문에는 X자 가래가 붙어 있다. 이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현종 8년(1667)에 간행된 『종묘의궤』에 실린 <종묘영녕전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대문의 변천
종묘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중건되었지만 이때 외대문까지 복원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외대문의 보수 기록은 『승정원일기』 숙종 38년(1712) 2월 25일의 기사와 영조 17년(1741)에 간행된 『종묘의궤속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숙종 38년 외대문이 낡았다며 보수하게 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2년(1726) 1월 12일과 헌종 2년(1836) 1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종묘 전각 증축을 위한 자재를 들이고 낼 수 있도록 외대문 서쪽 협문 문지방을 제거한 기록이 있는데, 필요에 따라 문지방을 제거했다가 다시 붙이는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도로를 내기 위해 종묘 담장을 허무는 바람에 전주이씨종약원에선 도로건설을 매우 크게 반대하였다. 그 당시 종묘 북쪽인 현재의 율곡로 방향 담장이 허물어졌는데, 그에 따라 종묘의 앞뒤로 자동차와 구루마가 지나가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2) 이 과정에서 도로면이 외대문의 3단 계단을 묻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이 묻힌 조선시대 계단을 발굴했고, 서울시에서 이를 복원했다. 현대 도시 건설로 종묘 앞길은 옛날과 같지 않으나 외대문은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며 종묘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2)문제의 간선도로, 종묘구내 통과, 종묘 구내 일부분과 동물원이, 이 공사에 헐러들어 갈듯하다(「조선일보」 1928.11.24.)종묘 일부분 신작도로에 반대. 전주이씨종약원의 반대가 많어, 도로공사 착수 불능(「조선일보」 1929.3.27.)헐려진 종묘담터에 凉蟬獨鳴舊日聲 울울한 수목이 고색을 자랑(「조선일보」 1931.8.2.).
글. 강정인(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전시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