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사비기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 부여 왕릉원
- 작성일
- 2023-08-3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422
‘잊힌 왕국’ 백제의 찬란한 역사
백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국가인데도 ‘잊힌 왕국’이라 불린다. 무려 678년에 이르는 백제 역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한성기의 역사 기록과 출토 유물이 매우 드문 탓이다.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493년 동안이나 지속된 한성기에는 역대 백제의 임금 31명 가운데 21명이 즉위했다. 기나긴 한성기의 종말은 참혹했다. 475년 9월 장수왕 휘하의 고구려군 3만 명은 7일 밤낮으로 한성을 공략해 끝내 함락시켰다.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장수 걸루와 만년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원래 백제 사람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친 죄인들이었다.
신라 원군 1만 명을 이끌고 뒤늦게 한성에 도착한 태자(제22대 문주왕)는 폐허가 된 한성을 포기하고 한 달 만에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지만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문주왕이 살해되는 등 정치 불안과 금강의 범람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산성은 협소해서 도성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결국 538년(성왕 16)에 사비천도가 단행됨으로써 웅진기는 63년 만에 끝났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22년 동안 지속된 사비기에는 제26대 성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모두 6명의 왕이 백제를 다스렸다. 그중 제28대 혜왕과 제29대 법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사망했지만, 나머지 왕들은 비교적 오랫동안 백제를 다스렸다. 특히 제27대 위덕왕은 무려 44년, 신라 선화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제30대 무왕은 41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성왕, 위덕왕, 무왕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의 새로운 중흥기를 열었다.
‘왕릉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까닭은
고대 왕릉과 백제 고분 가운데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곳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사적)에 위치한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백제시대 나머지 고분들은 주인을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발굴 조사 등 학술 조사 연구를 통해 왕 또는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여 현재 ‘왕릉원’ 또는 ‘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부여 왕릉원’도 오랫동안 ‘부여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리다가 2021년 9월에 ‘부여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여 왕릉원은 나지막한 능산(121m)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는 중앙고분군 7기, 서고분군 4기, 동고분군 5기 등 모두 16기의 고분이 분포돼 있다. 그중 한가운데에 자리한 중앙고분군 7기는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중앙고분군의 고분들은 널길을 통해 무덤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돌로 쌓아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7기 고분 중에서 6기는 아래와 위 2줄에 각각 3기씩 나란히 조성됐고, 맨 뒤에 7호분이 홀로 뚝 떨어져 있다. 아랫줄 맨 오른쪽의 1호분부터 시계방향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윗줄의 맨 왼쪽은 4호분, 맨 오른쪽은 6호분이 된다. 위치에 따라 붙여진 명칭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아랫줄의 동쪽에 자리한 1호분은 동하총, 가운데 2호분은 중하총이고 윗줄의 서쪽 4호분은 서상총, 가운데 5호분은 중상총이다.
조선시대 공주읍지에는 ‘부여현 관아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백제 왕릉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더욱이 옛날부터 이곳 지명이 ‘능뫼’ 또는 ‘능산리’라는 사실만 봐도 오래전부터 백제 왕릉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중앙고분군의 7기 가운데 1~6호분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부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됐다. 맨 위쪽의 7호분만 해방 이후인 1971년 보수공사를 하다 발견됐고,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되어 부장품 등의 유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부여 왕릉원의 여러 고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위덕왕의 묘로 추정되는 동하총(1호분)이다. 이 고분에는 백제 사비기 회화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길이 3.25m, 너비 1.51m, 높이 1.94m에 이르는 널방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그려져 있다. 처음 발견됐을 당시에 비교적 선명했던 벽화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부터 점차 퇴색되어 이제는 흐릿하게 윤곽만 남았다. 결국 벽화의 보존을 위해 동하총 내부는 폐쇄됐다. 그 대신 원래 그대로의 벽화를 재현해 놓은 모형 고분이 근처에 설치됐다. 동하총 옆의 2호분(중하총)은 널방의 천장이 터널 모양으로 축조돼 있다. 공주 무령왕릉과 유사한 면이 있어서 사비천도를 단행한 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현재 3호분과 4호분은 2020년 10월부터 시작된 학술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의자왕 단비와 능산리 사지 이야기
3호분 앞에서 탐방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m쯤 가면 한자로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 ‘백제국부여융단비(百濟國扶餘隆壇碑)’라고 각자된 비석이 세워진 묘 2기가 보인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이다. 중국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태자는 죽은 뒤에 낙양성 외곽의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920년에 태자 부여융의 묘지석이 발견됐고, 1995년에는 부여군의 현지조사단이 의자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를 확인했다. 필자도 2016년에 북망산을 방문해 의자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묘를 직접 찾아본 적이 있다. 잡목과 풀이 무성한 봉분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거나 구멍까지 뚫려 있어서 왕릉으로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내내 뻥 뚫린 듯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쉼 없이 들락거리는 듯했다.
의자왕 가묘 앞의 탐방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동하총의 모형 입구에 당도한다. 이 모형 고분과 건너편 산등성이의 나성(사적) 사이에는 능산리 사지(사적)가 넓게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위덕왕 13년(567)에 건립된 백제 왕실의 기원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해 전사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었다.
능산리 사지에서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등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갖춘 사찰로 밝혀졌다. 1993년에는 공방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에서 백제인의 탁월한 예술 감각과 놀랍도록 섬세한 공예기술을 보여주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가 출토되었다. 그와 함께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도 출토되어 절의 창건 연대와 사리가 봉안된 시기, 공양한 사람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연가와 벼루, 목간, 호자’ 금으로 만든 구슬과 꾸미개, 유리 조각 등 다양한 유물도 출토되었다.
능산리 사지의 서쪽을 에워싼 산자락에는 부여 나성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둘레 8km의 이 성은 백제의 새로운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한반도에서는 처음 축조된 외곽성이라고 한다. 부여 나성, 부여 왕릉원, 정림사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이 포함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글, 사진. 양영훈(여행작가, 여행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