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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문화재 행정의 초석을 다지다
작성일
2017-09-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730

한국문화재 행정의 초석을 다지다 - 정기영 전 문화재관리국장 개발과 문화재 보존이란 치열한 대립 속에서 언제나 ‘미래’를 먼저 생각한 정기영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뚝심으로 문화재를 지켜왔다. 한라산 원시림의 희생을 막았고, 경부고속철도가 경주 도시를 관통하지 않도록 싸웠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재 보호를 위한 행정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도 최선을 다해왔다. 35년간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좌) 1977년 경주 천마총을 찾은 APU 통신 부사장 내외를 안내하는 정기영 선생(왼쪽 첫 번째)  (우)정기영 선생

석굴암 강의에서 시작된 공직 생활

정기영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공직 이력이 독특해 행정직과 학예직을 오가는 지그재그 인생을 살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1937년(주민등록상은 1939년)에 태어난 그는 경남고를 거쳐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내각사무처(행정안전부)가 처음으로 도입한 4급 을류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해, 1964년 4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 행정주사보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5개월 뒤인 그해 9월, 학예사보로 전직해 나중에는 학예사로 승진했지만 그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전신인 문화재연구실이 출범한 1969년 12월, 다시 행정직으로 돌아갔다.

“처음 들어갔을 때, 행정직 정원은 넘치는데 학예직은 부족하다 해서 전직했어요. 별 차이 없는 줄 알았지요. 한데 지내다 보니 행정이 제 천성에는 맞아요. 그래서 행정직으로 돌아갔죠. 제가 자리를 비운 덕분에 다른 분이 학예연구관이 될 수 있었어요.”

그는 출범 초기에 어떤 인연으로 문화재관리국을 택했을까?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황수영 박사와의 인연을 든다. “황 박사가 그때 문화재위원장이자 동국대 교수로, 제가 4학년 때 한국미술사를 강의하셨어요. 미술사 강의가 아니라 실은 석굴암 강의였어요. 석굴암 중수 공사가 한창이었고 황 박사님은 그 공사 총감독이셨지요. 강의 때마다 박사님은 석굴암 관련 슬라이드를 가져 오셨어요. 저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래서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되자) 서슴없이 문화재관리국 근무를 자원하게 된 것이지요.

뚝심으로 지켜낸 한라산 원시림

문화재관리국 초창기 시절 종사한 분야는 문화재 지정, 그중에서도 사적과 천연기념물 담당이었다. “유형문화재 담당은 강인구씨나 이호관 씨였고, 나는 늦게 들어가서인지 문화재보호구역도 훨씬 넓어 골치가 더 아픈 문화재 지정 담당이었다”는 그는 “그때 경험이 이후 문화재 행정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정기영 선생은 그중에서도 한라산 천연기념물보호구역 지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서울시장을 역임한 구자춘 씨가 제주도 지사를 할 때였어요. 구지사와 제주도민들이 그때 외화 벌이 수단으로 표고버섯을 재배한다고 나섰지요. 해발 1,800m 이하 한라산을 표고 밭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문화재관리국에서 반대해서 못한다고, 대통령한테까지 하소연했어요. 그것을 제가 막았죠. 해발 800m 이상 한라산을 천연기념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거예요. 그때 논리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자산인 한라산 원시림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죠. 만약 당시에 한라산이 표고밭으로 변했으면 지금 모습이 어땠겠어요? 우직하게 한라산 보호를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제주도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겠어요?”

이 일을 당시 신문을 통해 찾아보니 1966~67년 무렵 사건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2~3년 된 겁 없는 학예사가 밀어붙여 한라산을 지킨 것이다.

1970년대 경주 문화재 개발과 강감찬 탄생지 발견

그를 기억하는 문화재청 사람들은 정기영 선생의 유별한 성정을 떠올리곤 한다. 부산 사나이라 그런지 몰라도, 그의 급한 성격이 가끔씩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문화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몇 년 전 타계한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과 더불어 한국문화재 행정의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정재훈 씨와 더불어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문화재 분야 양대 주축이었다.

“박 대통령이 경주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정재훈 씨는 바로 청와대 TF팀으로 활동했고, 저는 문화재관리국에 남아 문화재 관련 사업의 백 데이터를 찾는 일을 했어요. 그땐 정말 힘들었지만, 보람은 어느 때보다 컸어요. 1976~78년에는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으로 일했지요. 내국 귀빈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중요한 분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주말에 특히 많이 왔으니, 제대로 쉴 수도 없었지요.”

박 대통령의 문화재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유명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기영 선생도 홍역을 치렀다. “1960년대 말인가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들고 나온 거예요. 우리도 대응을 해야 했지요. 박대통령은 (역사학자인) 이선근 박사를 모셔다가 청와대에서 강의를 들었어요. 아마 그 영향 때문인 듯한데 어느 날 느닷없이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 유적지를 찾아내라는 지시가 내려 온거예요. 북한이라면 몰라도 남한에서 강감찬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1년을 보낸 어느 날 그는 낙성대가 다름 아닌 강감찬 탄생지임을 알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대목을 찾아낸거예요. 무릎을 쳤지요. 강감찬 사당을 비롯한 관련 시설은 그렇게 해서 조성했어요.”

35년간 의지로 이어온 문화재 사랑

문화재에 투신한 나날이 계속된 그의 공직생활은 1982년 12월에 새로운 전기를 맡는다. 문화재1과장인 그가 문화공보부 문화예술국 문화과장으로 전보된 것이다. 이후 잠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기획관으로 일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1995년까지 문화공보부에서 보냈다.

“당시 문공부 현안이 독립기념관 건립이었어요. 한데 그때 문공부에는 건설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화재 현장 경험이 많은 제가 불려갔죠. 가자마자 독립기념관에다가 예술의 전당 개관 준비 등으로 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요. 제가 우면산 예술의 전당 부지를 찍었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예술의 전당 이야기만 해도 반나절이 걸려요.”

1996년 1월, 문화재관리국장으로 화려하게 친정에 복귀한 그를 기다린 것은 경부고속철 문제였다. 노선 설계안은 경주 시내를 관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싸워서 이겼다. 힘겨운 투쟁 끝에 기어이 노선을 건천을 지나는 경주 외곽으로 돌렸다. 가짜 거북선 총통 사건이 터져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문화재 지정예고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듬해 3월 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35년에 이르는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퇴직 뒤에는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글+사진‧김태식(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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