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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한 조선의 무사 야뇌 백동수를 말한다.
작성일
2008-02-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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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가 있고 일본에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검객이 있다면, 조선에는 백동수가 있다.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가난하여도 나눔의 미학을 스스로 실천하는 야뇌. 진정한 무인으로 불리었던 조선의 무사 백동수를 만나보자.

벗을 사귀는 법
야뇌 백동수(1743~1816)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불세출의 조선 무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상하빈천을 아우른 폭 넓은 사귐을 통해 우정의 넓이와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그의 벗 박제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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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백동수의 자)은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분과 우정을 맺은 사람은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와 목사와 관찰사가 그분의 벗이고, 다음으로 현인 명사 또한 그분을 인정하고 추켜세웠습니다. 그 밖에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 그리고 혼인의 이를 맺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검을 쓰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 인장, 바둑, 거문고와 가야금, 의술, 지리, 방기의 무리로부터 시정의 교두군,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서 누구하고나 날마다 도타운 정을 나눕니다.”

백동수는 자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을 농부와 어부의 집이란 뜻을 담아‘초어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의 사랑방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 그가 성대중의 집에 놀러갔을 때 “어떻게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 또한 예법에 맞게 그를 상대하고, 글을 짓거나 서화를 그리는 선비를 만나면 나 또한 글을 쓰고 서화를 하는 법으로 그를 상대하였지요. 또 복서, 의약, 방기, 술수에 밝은 선비를 만나면, 나 역시 거기에 합당한 법도로 그들을 상대하였지요. 그들이 예법을 좋아하면, 나 또한 겸손으로 상대하는 것이외다.”


‘책만 보는 바보’라 불렸던 이덕무는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동무였고, 장성하여서는 그의 손위 누이와 혼인하여 처남매부지간이 되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데도 열심이었던 그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박지원에게 소개해 주었다. 홍대용, 유득공 같은 학자들도 일찍부터 그와 사귀던 벗이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의 한 산맥을 이루었던 북학파의 숨은 별이다. 백동수가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기린 골짜기로 농사를 지으러 들어갈 때, 박지원과 박제가는 그에게 이별의 글을 지어 주었다. 박제가는 자신에게 벗의 도리를 깨닫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백동수라 했다. 백동수는 무과에 급제한 1771년 봄에 박지원과 함께 북으로는 묘향산으로부터 남으로는 가야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백동수는 박지원에게 연암골을 찾아내고 그곳에 집터를 잡아 주었다. 박지원은 그때의 추억을 담은 글을 지어 기린으로 들어가는 벗의 결단을 격려하였다. 박지원의 호 ‘연암’에는 백동수와의 깊은 우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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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space=0 src=아호속에 담긴 뜻 - 점재, 야뇌, 인재
백동수는 호방한 성품을 지녔다. 성대중은 그를‘고삐로 묶어 두고 싶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굽힐 줄 모르고 성급하며 불같은 자신의 기질을 고민하던 백동수는 아호를 통해 자신을 단속하였다. 19세 때 스스로 지은 호가 천천히 나아간다는 뜻을 담은‘점재漸齋’였고, 가난해도 떳떳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담아 ‘야뇌’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타고난 성품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뜻을 담은‘인재靭齋’라는 호를 지어 벗들에게 불러 주기를 당부하며 자신을 단속하였다.
그러나 백동수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실격이었다. 30대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천금’의 재산을 다 써 버려 끼니를 걱정할 형편이 되었다. 그는 장사로 돈을 벌려고 동래에 내려갔다.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을 시도하였으나 본전도 못 건졌다. 재주가 많아 주위를 놀라게 했던 그였지만 이윤을 남겨야하는 장사에는 영 서툴렀다.
1773년, 백동수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목축을 하기 위해 온 가족을 이끌고 첩첩산골인 강원도 기린으로 들어갔다. 화전을 일궈 수수와 기장을 심고, 울타리를 쳐 가축을 길러 목축에 성공하였다. 물론 계절마다 닭과 돼지를 잡고 술을 걸러 이웃 어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hspace=0 src=문무경전-학문과 무예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명문 무가武家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와 당대의 빼어난 무인, 장안의 협객들과 두루 사귀었고, 조선 최고의 검객 김체건의 아들로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술을 익혔다. 병법을 깊이 연구했고, 변란을 대비하여 중국의 산천과 국경 수비의 형편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공부하였다. 중국 변경의 형편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그의 대답은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소년시절엔 공부를 소홀히 하였으나 나이 들어 학문에 매진하여 당대의 최고로 자부했던 벗들도 백동수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덕무는 자신이 지은 글에 대한 비평을 백동수에게 자주 부탁하였다. 고문의 대가로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입었던 성대중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예는 물론 그림도 잘 그려 단원 김홍도와 화법을 논했을 정도였다.


 hspace=0 src=<무예도보통지>편찬을 총감독하다
 hspace=0 src=강원도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하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1788년 겨울, 개혁 군주 정조가 백동수를 친위군영인 장용영의 창검초관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백동수는 국왕 정조를 호위하고, 창덕궁 춘당대에서 장용영 무사들에게 무예를 지도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임무는 무예의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듬 해 가을, 백동수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세 사람은 장용영에서 합숙하며 편찬에 전념하였다. 마침내, 1790년 4월 29일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세밀한 그림과 상세한 설명을 붙여 놓아 장수와 병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무예 교범서의 모범이며, 한중일 동양 삼국의 우수한 무예를 집대성한 동양무예의 고전이다.
백동수는 공로를 인정받아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를 역임했다. 고을 수령이 되면 모두가 한 밑천을 장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모으기는 고사하고 이때 받은 봉록조차 빚을 갚는데 다 써 버려 생활이 늘 어려웠다. 1816년 10월 3일, 백동수가 포천 집에서 눈을 감았다.

“백영숙의 집안은 본디 넉넉하였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어졌지만 베풀어 주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중략] 애석하도다! 다시는 기남자를 볼 수 없음이여!”

벗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은 평생을 당당하게 살았던 백동수의 비범한 생애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민족 무예의 역사와 조선 무사의 삶을 더듬을 수 있다. 또한 그와 그의 벗들의 이야기들은 요즘 세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참된 우정과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시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 글_ 김영호
▶ 사진제공_ T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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