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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류집안의 상징, 유모
작성일
2015-01-0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360

상류집안의 상징, 유모. 고종1년(1864) 4월18일이었다. 고종은중희당에거둥擧動했다.『 소학』진강進講을위해서였다. 고종이 먼저『소학』을 읽었고, 뒤이어 신하들도 읽었다. 고종은 신하들에게“‘반드시 관유자혜寬裕慈惠하고 온량공경溫良恭敬하면서 신중하고 말이 적은 자를……’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유만원은“어릴 때에는 모든 보고 듣는 것이 주체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린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유모를 간택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한 김세호는“제모(諸母, 유모)를 간택하여 자식의 스승을 삼음에 있어서 반드시 말을 적게 하는 이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실에서 유모 선정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01. 신한평 필 <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봉보부인奉保夫人은 누구일까?

유모는 단순히 왕세자의 젖어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의 첫 스승을 선발하는 의미였다. 그래서 왕가에서 유모를 ‘유모’ 나 ‘보모’ 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자사子師’ 라고 불렀으며, 가르치는 것 을 양육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양반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류층 아이들은 열 살 이후가 되면 집 바깥에서 스승을 구하지만 그 이전에는 유모가 스승의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조선시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는 종1품 벼슬을 받았다. 왕비가 왕자를 낳지만 왕자를 기르는 것은 유모의 몫이었다. 왕자의 보양과 장래를 책임지는 유모의 지위와 대우는 각별했 다. 일례로 영조는 왕세손(훗날 정조)의 유모가 술을 즐기는 것을 언짢아하면서도 차마 유모를 내치지 못했다. 오히려 영조는 유모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왕세손의 건강을 면밀히 진단하라고 의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또한 유모에게도 좋은 약을 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를 보면 왕가 유모의 위상을 짐작할만하다.

 

죽어서도 너를 기른 유모를 잊지말라

유모는 ‘유온’ 혹은 ‘아지阿之, 阿只', 내유온’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유모를 통한 아이의 양육은 상류 계급의 풍습이자 문화였다.

유모를 선발할때는 유모의 신분과 가정환경과 건강 상태를 고려했으며 특별히 유모의 인품에 신경을 썼다. 아이는 ‘젖어멈’ 을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젖어멈의 품성을 그대로 닮는다는게 옛날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때문에 유모를 선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유모의 역할은 아이의 보양과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유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는 임무였다. 유모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은 유모의 잔병이 아이에게로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유모의 역할은 더욱 막중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 약을 직접 투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모는 아이에게 투약될 약을 대신 먹었다. 그러면 아이는 유모의 젖을 통해 치료약을 간접적으로 복용하게 된다. 유모의 유두와 젖은 일종의 의료 기구이자 의약품인 셈이었다.

유모는 왕실과 양반가를 지탱해가는데 매우 중요한 직업이었다. 이에 왕가의 유모일 경우에는 유모의 자식이나 남편에 대해서 속전贖錢을 면제하고 면천免賤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양반가에서는 신부의 예단 품목에 유모의 예단도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이자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던 택당 이식李植은 유훈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유모의 묘에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것이 었다. 그만큼 유모는 왕가나 사대부가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자 특별대우를 받았던 직업이었다.

 

젖어멈은 모성을 대체할 수 없다

근대 초기에 들어서면 유모의 역할은 조선시대와는 달랐다. 유모의 역할은 스승보다는 젖어멈에 방점이 찍혔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유모를 들이는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02. 덕혜옹주 회갑 기념사진. 좌측 첫번째 인물이 덕혜옹주의 유모인 변복동 여사, 두번째 인물이 덕혜옹주다.

유모가 필요한 가정은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거나 직업소개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유모를 선택하는 기준은 여전히 까다롭고 엄격했다. 유모를 들일 때에는 유모의 나이, 건강, 덕성, 젖의 상태 등을 확 인했다. 더러 유모의 혈통을 따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혈통이란 유모의 출신 성분이라기보다는 그 집안의 가족력을 의미했다.

근대 사회는 유모의 젖을 ‘돈으로 교환 가능한 상품’ 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젖을 밑천삼아 가난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팔 것이라고는 젖밖에 없었던 가난한 가정들이 그랬다. 일부 여성 들 또한 유모의 젖을 일종의 상품으로 취급했다. 유모가 된 여성은 자신의 젖을 고용된 가정의 아이에게만 물릴 수 있을 뿐, 자신의 아이에게 나눠주면 해고를 당했다. 즉 ‘젖의 소유권’ 문제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스승으로서의 유모가 아니었다. 이보다는 영양분 많은 젖을 공급하는 건강한 여성이 필요할 뿐이었다.

아이의 인성을 교육하기 위해 유모를 들였던 전통은 점차 사라져갔다. 대신 유전적 어머니가 아이의 첫 스승 역할과 인성 교육을 떠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모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의 양육에서 중요한 것은 유모가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그 어떤 유모의 품성도 유전적 어머니의 모성을 대체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글 이승원(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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