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임진강 절벽 위의 옛 성터
작성일
2019-09-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771

l_01.jpg



국경하천으로서의 임진강


서울에서 양주를 거쳐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가로놓인 임진강에는 비가 많이 오는 우기를 피하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나 나루터들이 있다. 임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다툼을 벌이던 삼국시대에 이곳의 방어를 위해 세워진 성들이 지금도 강안을 따라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임진강과 그 지류에 의해 형성된 자연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된 당포성은 당개나루의 요충지를 통제하던 방어성곽이었다.


당포성이 위치한 연천군은 한반도의 중간지점으로 현재 남북을 나누는 군사분계선이 파주에서 이곳을 지나 철원으로, 그리고 동해안 고성까지 연결되어 있다.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할 때의 지명은 공목달(功木達)이었으며, 고려 후기인 1309년 지금의 ‘연천(漣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인근의 군현들과 여러번에 걸친 통폐합 과정을 통해 지금의 영역으로 조정되면서 경기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지역이 되었다. 임진강이 연천군을 크게 양분하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한탄강을 만나 다시 북쪽으로 돌아드는 강 북안의 단애상에 조성된 당포성은 남한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고구려 계통의 성이다.


이 성에 대한 문헌 기록으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기언별집(記言別集)』에 “마전(麻田)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叢祠)가 있고, 그 앞의 물가를 당포라고 한다. 큰물이 흘러 나루 길로 통한다.[麻田前岸江壁上有古 壘 今其上爲叢祠 其前浦曰堂浦 大水則津路所通…]” 가 유일하다. 이 글에 당포성을 “고루(古壘)”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세기에는 이미 폐성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포성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황사는 1935년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으며 최근까지는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당포성 앞을 흐르는 임진강은 국경하천으로서 삼국시대와 오늘날에도 한강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툼을 벌였던 싸움터였으며, 지금은 남북을 가르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l_02.jpg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 당포성


당포성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였다. 정식발굴은 2002년 10월에서 2003년 5월까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연구실에서 실시하였으며, 자료의 희소성과 역사적 사료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으로 인정되면서 2006년 1월 2일 국 가지정문화재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2013년에는 연천군과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당포성 외부공사 구역내 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에 의해 성이 축조되었으며 통일신라 시기 개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포성은 임진강 본류와 당포나루로 흘러오는 지류사이에 형성된 약 13m 높이의 절벽 위 삼각형 대지에 쌓은 고구려의 방어성곽이다. 평지와 연결되어 있는 동쪽 입구를 가로막아 성벽을 쌓은 평지성으로, 성벽을 높게 쌓은 동쪽과 달리 단애지대를 따라 구축된 남·북 성벽은 낮게 축조되었다. 성의 전체 면적 35,174㎡이며 서쪽 끝에서 동쪽 성벽까지의 길이는 200m이며, 전체 둘레는 450m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쪽 성벽은 그 길이가 50m이고, 높이 6m이며 성벽 단면 기저부는 39m 정도이다. 성내부로의 출입으로 인해 동쪽 성벽의 남단은 일부 파괴되어 출입로가 만들어졌다. 북쪽 성벽의 길이는 약200m이며 역시 참호 건설로 인해 석축의 단이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남쪽 성벽은 임진강을 끼고 형성된 단애지대 위에 축조한 지점으로 길이는200m 정도이며 현재 석축의 단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다.



l_03.jpg


당포성은 보축벽을 3~4중으로 높게 쌓았으며, 성벽 상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기둥’이라 할 수 있는 수직홈이 파여져 있고 그 밑에 동그랗게 판 확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성벽 밖에는 폭 6m, 깊이 3m의 대형 해자가 있는데 우기에 물이 고이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개 물이 없는 해자였을 것 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동벽 밖 70m 거리에 외성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었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둑으로 조성된 것으로 성벽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토기, 자기,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되었으며, 석기, 철제 가위, 철제 솥 조각 등이 나왔다.


당포성은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신라가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면서 신라에 의해 다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의 입지나 전체적인 형태가 주변에 위치한 호로고루나 은대리성과 매우 흡사하며, 특히 축조방식은 호로고루와 유사하다. 임진강이 국경하천 역할을 하던 삼국시대에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축조된 관방유적이다. 특히 북쪽으로 도하가 용이한 지점인 당계 나루터를 끼고 성을 쌓음으로써 남쪽 세력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양주 분지를 거쳐 당포성이 위치한 당계나루의 여울을 거쳐 개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가장 단거리의 요도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l_04.jpg



아쉬움을 남기며


연천군에서는 여러 번의 발굴 작업을 포함하여 『경기도 고구려 유적 종합정비기본계획』과 『연천 고구려 3대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당포성에 대한 정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이에 따라 크게 훼손되어 폐허처럼 남아있던 당포성의 동쪽 성벽을 보수하고 성벽 위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관광객들이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동안 찾아가기 불편했던 성의 진입로에는 도로를 설치해 접근성을 높이고 주차장과 화장실을 설치함으로써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유적지 곳곳에는 안내판들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포성의 역사와 유적의 특징들을 자세히 설명해 놓음으로써 유적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여러 번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당포성만이 갖는 특징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이곳으로 흘러드는 샛강이 만든 독특한 자연경관을 이용해 만들어진 강안평지성으로 호로고루와 은대리성과 함께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유적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성의 북쪽 구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성벽위에서도 샛강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이곳과 유사한 형태인 호로고루에는 샛강을 정비해 놓았을 뿐 아니라 이 방면의 풀들을 정리해 놓음으로써 성 안에서도 쉽게 샛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안평지성이 갖는 특징과 그 아름다움을 잘 관측할 수 있는 것은 강 쪽에서 이 성을 바라볼 때이다. 강 건너 혹은 부근의 다리 위에 이 성이 잘 관측되는 포인트 지점을 두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한편 북쪽 방면의 무성한 풀들을 제거한 뒤에 이곳에 당포성의 모형을 설치해 두거나 멀리서 보이는 당포성의 모습을 찍은 커다란 사진을 설치해 두는 방안 등도 있다.


또한, 당포성은 주변의 호로고루와 은대리성과 그 형태와 구조가 비슷하면서도 이곳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특히, 동벽 위에 파여 있는 ‘구멍기둥’과 세트를 이루는 그 아래의 ‘확’은 유일하게 당포성만이 갖는 특징이다. 또한 동벽 앞에는 방어를 위한 해자가 있고, 성내에는 건물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붕괴의 위험이나 훼손의 우려를 염려하여 둔덕처럼 보이는 동쪽 성벽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태이다. 당포성이 갖는 관방유적지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굳이 동일한 자리가 아니더라도 부근에 모형을 두어 볼거리를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 유적지 복 원에 이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실제 당포성은 정비된 동벽위에서 관측되는 주변을 흐르는 임진강 풍경과 성벽 위에 심어져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갖는 정취로 관광객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잘 정비된 당포성은 임진강과 어우러져 산뜻한 풍광을 자랑하지만 일부 성벽과 안내판 외에는 이곳이 관방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당포성만이 갖는 특 징들을 좀 더 보강하여 복원한다면 이곳을 답사하는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흔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이러한 배려는 귀중한 문화유적이 갖는 가치를 높이는 방안이 될 것이다.



글. 정원주 (한림대학교 강사)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