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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官)과 민(民), 남북 협력으로 환수 북관대첩비
작성일
2016-07-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847

관(官)과 민(民), 남북 협력으로 환수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남과 북, 관(官)과 민(民)이 한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지나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며, 훼손된 수난의 흔적을 없앨 수 있었다. 복원이 완료된 북관대첩비(북한 김책시)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놓여 있었던 북관대첩비 모습

북관대첩비 건립과 일본 반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였던 정문부 장군이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격퇴한 전공(북관대첩)을 기리기 위해 1707년(숙종 34)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리(현 김책시 임명동)에 건립된 기념비이다. 비(碑)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의 대승전 기록이다. 이 비가 ‘왜,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가?’ 살펴보면, 북관대첩비가 세워지고 200년 후인 1905년 러일 전쟁 중에 일본군 미요시 중장이 이 비를 일본의 치욕적인 역사라 하여 강탈해가는 비극이 일어났다. 강탈 후 조선에 패배한 굴욕을 씻겠다는 명목 아래 야스쿠니 신사에 비를 보관하게 된 것이다.

 

북관대첩비 반환운동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우연히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여, 비를 가져온 일본을 꾸짖는 글을 기고하면서 북관대첩비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1978년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 선생이 그 기고문을 보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다시 비를 찾아내면서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 요구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해주 정씨 문중에서는 한일친선협회를 통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측에 처음으로 비 반환을 요청하였고, 1979년 한국 정부의 비 반환 공식 요청에 일본 정부는 원소재지인 북한과의 합의가 있으면 반환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된 반환 요청에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합의가 필요하며 당시 점유자였던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 반환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 반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차원의 지속적인 반환 노력으로 2005년 3월 남측의 한일불교복지협회(초산스님)와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박태화) 간의 비 반환에 관한 남북합의서가 체결 되었고, 같은 해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총리가 반환에 합의하였다. 2005년 10월 20일 일본으로 반출된 지 100년 만에 비가 돌아와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니 오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실인 셈이다.

 

북관대첩비 반환 및 복원

필자를 포함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05년 7월 비의 현황과 해체, 이송방법 등을 강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서니 어딘가 있을 북관대첩비를 처음 마주할 설렘에 긴장됐다. 그러나 습하고 구석진 그늘의 허름한 보호각 아래 천덕꾸러기처럼 놓여있던 북관대첩비를 보고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우거져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한 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북관대첩비는 벌 받는 것처럼 무겁고 조악하기 짝이 없는 머릿돌을 지고 있었다.

한국으로 옮겨진 비는 먼저 암석 조사, 오염물 분석 등 과학적 조사를 통해 오염물 세척, 균열 부분 수술 등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실측작업을 통해 복원도 실시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부터 이고 있던 핍박의 역사인 1,000㎏가량의 머릿돌을 벗어던지고, 북관대첩비 조성 당시와 유사한 시기에 조성된 해남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1688년)와 강진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보물 제 1396호, 1681년) 등의 머릿돌을 참고하여 복원안이 제시되었다. 여러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쳐 화강암으로 정성껏 조각하여 북관대첩비에 새로운 머릿돌을 올렸다.

2005년 10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에서 환국고유제를 지내고 10월 28일부터 11월 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머릿돌이 복원되고 보존 처리가 된 북관대첩비가 조립되어 전시되었다. 그렇게 전시되어 있던 북관대첩비는 2006년 3월 1일, 북한 개성으로 이관되어 인도인수식을 가졌다. 2006년 3월 23일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복원된 북관대첩비는 현재 북한 제193호 국보유적으로 등록되어 역사적 가치를 되찾았다고 한다. 남북교류의 문화재 사절단으로써 첫 테이프를 끊은 의미 깊은 북관대첩비. 비록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지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 손으로 애써 보존 처리한 만큼 한국에 남아주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아 소중함을 인정받고 있다고 하니 그걸로 뿌듯한 마음이다.

 

글+사진‧김사덕(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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