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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주 에나길 어제의 흔적 위로 오늘의 삶이 흐르는 남강변 풍경
작성일
2024-04-26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52

진주 에나길 어제의 흔적 위로 오늘의 삶이 흐르는 남강변 풍경 대개 진주라고 하면 임진왜란의 격전지로 역사에 기록된 진주성 전투와 그 진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적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논개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어제의 흔적 위로 새로운 나날이 쌓이는 법이다. 조선조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진주에도 다양한 시간의 축이 교차한다. 근대화가 추진되던 시기의 진주도 제 모습을 감추지 않고 우리를 맞는다. 00.진주성과 촉석루

잃어버린 것, 되찾아야 할 것에 관하여

오늘날 경상남도청은 창원시에 있다. 그 이전에는 부산, 그보다 더 먼저는 진주에 있었다. 1896년(고종 33년) 칙령 제36호로 발효된 지방제도와 관제 개정에 따라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는데, 이때 경상도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진주에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경상남도 관찰사가 파견됐다.


1896년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바로 전 해이다. 근대화가 추진되기 시작할 무렵 도청소재지가 된 진주는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말 그대로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고장이었다. 이는 진주 시내 곳곳에 꽤 규모 있는 근대 건축물이 남게 된 이유이자 진주의 역사·문화유산 상당수가 훼손된 배경이기도 하다.


일제가 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관찰사는 진주성(사적) 경내에 자리한 선화당에서 도정 업무를 보았다. 아쉽게도 현재 선화당은 터만 남았다. 진주성 경내 공간들은 일제강점기에 상당 부분 훼손됐다. 일제는 부산을 동아시아 수탈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했고, 이후 조선총독부 토지국은 도시개발을 명목으로 진주성 곳곳을 허물었다. 진주성 외곽에서 해자1) 역할을 했던 연못 대사지까지 메워 시가지를 정비했다. 그 당시 지역민이 대대적으로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을 펼쳤지만 그 뜻은 이루어 내기 힘든 일이었다.


근대기를 지나며 생채기 투성이었던 진주성은 안타깝게도 6.25전쟁을 거치며 소실 범위가 더 커졌는데, 다행히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나서 6.25전쟁 때 불에 탄 촉석루부터 복원을 시작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와 같은 복원 노력은 형태의 회복을 넘어 지역의 정체성, 공동체성의 회복과도 연결된다는 지역사회의 목소리에 힘입어 최근에는 경상남도 분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선화당 복원도 추진되고 있다.


1) 해자: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량을 내거나 자연 하천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는 성곽시설


01.인사동 골목의 가게 02.진주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 03.진주 옥봉성당

역사와 문화, 예술의 기운을 따라 거닐다

진주에는 ‘진주 에나길’이라 명명된 역사·문화·생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에나는 진주 지역 사투리로 ‘참’, ‘진짜’라는 의미다. 진주 에나길은 걷기 좋은 진주의 도심 둘레길이라 할 수 있겠다. 두 개의 코스 가운데 제1구간이 진주성 서장대에서 시작해 도심 곳곳에 자박한 역사·문화·예술의 기운을 담뿍 느끼게 한다.


진주성 북문에 해당하는 북장대 아래로 묵은 세월을 가늠케 하는 물건이 줄을 잇는다. 골동품 가게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인사동 골동품 거리다.(사진 01) 진주에 골동품과 관련한 특별한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라 했지만 경상남도 수부 도시였던 만큼 세를 떨친 이들도, 그들이 간직한 귀한 물품도 많지 않았겠나 짐작해 본다. 1970년대 후반 봉선당, 진보당 등 몇몇 골동품점이 영업을 시작했고, 이후 주변으로 골동품 가게가 하나둘 이전해 오면서 자연스레 골동품 거리가 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600m 남짓으로 규모가 크진 않지만 민속 공예품, 고문서, 석물 등 볼거리는 충분하다. 안목이 없으면 어떤가. 취향 따라 기념할 만한 것들을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려볼 수도 있겠다.


진주 에나길은 진주 배영초등학교 구 본관(국가등록문화유산, 사진 02) 자리로 이어진다. 1908년 진주에 살았던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진주공립심상소학교가 진주배영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진주배영초등학교는 1998년 신안동으로 이전했지만 그곳에 1938년에 지은 소학교 건물이 남아 있다. 현재는 진주교육지원청으로 활용하고 있는 진주배영초등학교 구 본관이 바로 그것. 중앙 현관을 기점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 이 붉은 벽돌조 건물은 세로로 긴 오르내리창, 굴뚝 등 근대 건축물 특유의 수직성이 도드라진다. 우리 전통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진주성과 가까운 곳에 들어서 있으니 그때 그 시절에는 더욱 낯설고도 신기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근대기 진주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 건축물로 진주배영초등학교 구 본관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진주 옥봉성당(사진 03)도 빼놓을 수 없다. 1933년 건립된 진주 옥봉성당은 붉은 벽돌조에 아치로 된 창과 문이 돋보인다. 6.25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성당 규모도 2배 가까이 커졌고, 뾰족한 종탑이 더해졌는데 이는 근대기 종교 건축물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뿐 아니라 진주는 토호와 유림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외래문화가 자리 잡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니 근대기 진주 도심에 들어선 이 옥봉성당은 진주 지역의 문화적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도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04.천황식당 05.천황식당 진주비빔밥

꼭꼭 씹어야 할 것이 어디 밥뿐일까

조선시대 오일장으로 개설되었다가 일제강점기부터는 상설시장으로 거듭난 진주중앙시장 주변으로 진주비빔밥, 진주냉면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는 노포들도 근대와의 조우에 즐거움을 더한다.


우리나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다고 한다. 이는 예부터 일가를 이룰 만큼 빼어난 인물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진주에 교방 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진주의 향토음식도 그중 하나로 해석해 볼 수 있다. 1915년 진주장에서도 땔나무를 파는 이들이 늘어서는 나무전 거리 앞에 문을 연 천황식당은 진주의 오랜 헛제삿밥 문화에 뿌리를 둔 정갈한 진주비빔밥을 차려내는 집이다. 천황식당 외에도 서로가 원조 맛집이라 다투지 않고 지역의 문화를 이어가는 집이 여럿이니 시장 주변을 맴돌며 어디에서 무엇을 맛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백년가게에 자리를 잡고 밥술을 뜨는데, 문득 꼭꼭 곱씹어야 할 것이 어디 밥뿐일까를 되뇌게 된다. 하루에 백여 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근대기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다 보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이들 흔적이 어찌하여 그 자리에 남게 되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나와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것만 같은 지난 시간의 흔적이지만 그 이야기를 더듬으며 기대하게 된다. 혹시나 먼 훗날 누군가가 내가 걸은 이 길을 걸으며 오늘의 우리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은 사라질 뿐이니 이 땅과 이 거리를 걷는 우리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 귀한 경험을 계속하려면 밥심을 보태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글. 서진영(『하루에 백 년을 걷다』 저자) 사진.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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