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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방인의 삶 고려 수월관음도
작성일
2024-04-26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6

이방인의 삶 고려 수월관음도 고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인 가운데 28번째 관음보살을 만나 청문하는 장면을 묘사한 불화이다(그림 1). 동북아시아 불화 가운데에서도 명품으로 평가받는 고려 수월관음도는 애석하게도 여러 가지 사유로 모국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이방인의 삶을 살아왔다. 01.[그림 1] <수월관음도> 고려14세기 비단에 채색 115.2×54.9cm일본 센오쿠하쿠코[泉屋博古館]

모국에서 타국으로 이주당하다.

예술미를 간직한 고려불화는 지금까지도 상당수가 해외 이곳저곳을 떠도는 수난을 겪고 있다. 현재 총 190여 점의 고려불화 가운데 해외에 흩어져 있는 불화는 160여 점이나 된다. 그 가운데 130여 점이라는 압도적인 수량이 일본에서 이방인으로서 낯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수월관음도는 그중 40여 점으로 30%를 차지한다. 이들은 어쩌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이주의 경위에는 여러 단계의 역사적 배경이 얽혀 있다.


첫째, 여말선초에 성행한 왜구 침입과 임진왜란을 꼽을 수 있다. 왜구의 노략질과 전쟁은 궁궐, 귀족 저택, 사찰에 봉안되었던 고려불화가 한반도를 벗어나 해외로 유출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둘째,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가의 관심과 보호로부터 벗어난 고려불화가 일본의 요구로 증여된 경우도 있다. 셋째는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일본에 매각된 경우인데, 실제 대마도를 거점으로 고려 상인과 일본 간 교역을 통해 선재(船載)된 불화가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로 유입된 사례가 있다. 마지막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개연성이다. 조선총독부 주관의 대규모 문화재 조사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보존되는 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당수 문화유산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흘러갔다.


낯선 땅에서 카라에[唐繪]가 되다.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경로를 통해 유출된 고려불화를 일본인은 어느 나라 그림으로 인식했고, 또 어떻게 다루었을까? 그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군다이칸소우쵸기[君台觀左右帳記]』다.


『군다이칸소우쵸기』는 무로마치시대(1336~1573) 쇼군[將軍: 당시의 실질적인 통치자] 가문에서 바다를 건너온 카라모노[唐物: 중국의 문물과 일본에서 제작된 중국풍의 문물을 총칭하는 용어]의 소장관리·가치측정·손님방 장식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노아미·게아미·소아미로 이어지는 삼대가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기에 걸쳐 완성한 안내서이다. 이 안내서에는 카라에[唐繪: 중국풍의 그림]의 간단한 기준이 제시되었는데, 중국 화가를 상·중·하 3개 품등으로 나누고, 시대별로 배열한 후 화가의 자(字), 출신지, 득의(得意)한 그림의 주제를 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이 책은 카라에 감정의 가장 신뢰받는 지침서로 전승되면서, 작가 불명의 카라에 그림의 주제와 화가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특히 카라에 중 작가 불명의 관음보살도는 「上/唐/上/吳道玄/字道子/陽翟人/觀音」의 내용에 근거해 보관함 표면의 묵서나 감정서에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작품으로 명기되었다(그림 2, 3). 이런 방식으로 화가를 알 수 없는 일본 내 많은 고려 수월관음도는 ‘메이드 인 고려’가 아닌 ‘메이드 인 당’ 즉, 카라에로 오인되어 갔다. 타국의 이방인이 되는 것도 모자라 그 정체성마저 바뀌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게 된 것이다.


02.[그림 2] 그림 1 <수월관음도>의 보관함 03.[그림 3] 『군다이칸소우쵸기[君台觀左右帳記]』 1511년(永正八年) 일본 도호쿠[東北]대학 붉은 실선 삽입:필자

화성(畵聖) 오도자의 명작으로 평가되다.

오도현(吳道玄)으로도 알려진 오도자는 당나라 전반기를 주름잡았던 도석인물화의 대가였다. 그는 당나라의 장언원과 주경현의 저서인 『역대명화기』와 『당조명화록』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화성(畵聖)으로 평가받았고, 신(神)·묘(妙)·능(能)·일(逸)로 분류되는 화품(畵品)에서 유일하게 신품에 위치해 있었다. 북송의 곽약허(郭若虛)도 『도화견문지』에서 그를 화성으로 칭송하며 그의 화풍이 후대에 널리 전해진 것은 당연지사라 여겼다.


한편, 오도자의 평가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태종은 황희에게 권중화가 “오도자가 그린 관음상에서 광채가 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하고, 성종은 화공의 보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지금 화공 중 오도자에 견줄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오도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도자의 평가는 일본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았으며, 이러한 시선은 뛰어난 고려 수월관음도를 주저 없이 당나라 화성 오도자의 작품으로 확신케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모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 수월관음도는 비록 정체성은 바뀌었으나 뛰어난 화격으로 인해 당나라 화성의 작품으로 귀중하게 다뤄지며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온, 전화위복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고려의 오리지널 명품으로 재발견되다.

일본은 1873년경 아시아 최초로 서구의 ‘미술’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수용하여 ‘미술사’를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쇼군과 다이묘, 사찰과 신사에 소장된 카라에를 조사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이관해 연구·전시·출판을 진행하였다. 고려불화가 어쩌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7년 구마가야 노부오[熊谷宣夫]의 「朝鮮佛畵徴」(『朝鮮學報』44)을 통해 카라에에 묻혀 있던 고려불화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서막이 열렸다. 그 후 여러 작품이 고려불화로 정체성을 되찾아 갔고 관련 연구 성과와 자료가 축적되자 1978년 일본 야마토분가칸(야마토 문화관) 당시까지 발굴된 고려불화를 총망라하는 최초의 전시1)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고려불화가 고려 불교미술품 중에서도 ‘오리지널 명품’이라는 일깨움과 존재감을 알려준 동시에 동아시아 불화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제공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정체성을 잃어버린 고려불화가 다시 본래의 아이덴티티를 찾게 된 순간이 왔다. 현재까지 각별한 관심과 갖은 노력 끝에 30여 점의 고려불화가 모국으로 돌아왔다. 아직 환지본처(還至本處: 본래의 처소로 돌아간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하지 못한 이들이 많으나, 이제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일이 더는 없으리라.


1) 고려불화 총망라 하는 최초의 전시: (고려 불화- 우리나라에 건너온 이웃나라의 부처들)《高麗佛畵-わが國に請來された隣國の金色の佛たち》




글·사진. 류상수(부산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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