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기고
- 제목
- 절친 3인의 단합대회, 단원도
- 작성자
- 황정연 연구사
- 게재일
- 2016-07-07
- 주관부서
-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 조회수
- 3933
그림을 천한 기예로 여긴 조선시대에 직업화가들은 예술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단원도(檀園圖)>(사진)를 그린 김홍도(1745~1806이후)는 예외였다. 예단의 총수 강세황을 사사하였고 정조임금의 후원을 받았던 그는 우리에게도 풍속화의 대가로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홍도의 삶이 언제나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화공으로서 여전히 세상의 편견을 감내해야 했고 후원자였던 정조임금이 승하한 후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언제 죽었는지 뚜렷한 기록도 없다. 나름 고단한 생활을 했던 그의 곁에는 두 친구가 있었으니, 정란(18세기)과 강희언(1738~1784)이 그들이다.
<단원도>의 무대는 다름 아닌 김홍도 자신의 집이다. 화면의 윗부분에 쓰인 글에 의하면 김홍도 나이 37세 때인 1781년 12월 입춘이 지난 후 정란, 강희언과 함께 자신의 집 사랑방 마루에서 세 사람의 모임을 ‘진실되고 법식에 거리낌 없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진솔회(眞率會)’라 이름을 짓고 소박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이가 김홍도, 무릎을 세운 채 부채질을 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는 이가 강희언, 그 옆에 앉아 장단에 맞춰 시를 읊고 있는 이가 정란이다. 강희언은 중인가문 출신으로, 하늘의 기운을 관찰하여 운세를 점치던 관상감(觀象監) 소속 운관(雲官)이었다. 김홍도보다 나이는 위였지만 서로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림도 잘 그려 주옥같은 작품을 여럿 남겼다. 정란은 시인이자 여행가이다. 부산 동래 출신인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 천지를 넘나들며 시인묵객들과 어울린 풍류객이었다.
김홍도가 <단원도>를 실제 그린 때는 이들이 모임을 열고 3년이 지난 1784년이다. 3년 후 세 사람의 삶은 많이 변해있었다. 김홍도는 오늘날 면사무소장 정도에 해당하는 안동의 찰방(察訪)으로 부임했지만 생활이 몹시 궁핍했다고 하며, 강희언은 그 사이 세상을 떠났고 정란은 세상풍파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다. 김홍도는 이 그림을 통해 현실은 힘들었지만 각자 분야에서 한 시기를 풍미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림 위에 정란이 “단원거사(김홍도)는 풍채가 좋고 자세가 바랐고 담졸(강희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지”라고 쓴 구절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 단원도, 1784년, 종이에 담채, 78.5 x 135cm, 개인소장>
<단원도 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