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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멋과 유행을 선도했던 장인들의 공간
작성일
2016-12-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4173

멋과 유행을 선도했던 장인들의 공간 상의원(尙衣院) 예나 지금이나 복식(服飾: 옷과 장신구)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도구를 넘어, 인간의 외형을 최종적으로 꾸미고 다듬는 역할을 해왔다. 옷을 입은 사람의 신분이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마무리 짓느냐에 따라 사람을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들 수있 다. 더 나아가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됨을 다듬고 완성해주는 복식이 문화를 이루고 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됐다.

상의원,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만민이 평등하다는 현대에도 복식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보여준다. 하물며 지엄한 신분 계급 사회에서, 사람됨을 표현할 방법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복식의 위력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힘을 가장 극대화해 이용했던 사람들이 바로 왕족이었다. 때문에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왕족들은 유감없이 그 위력을 행사하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복식을 활용하였다.

2년 전 <상의원>이란 영화가 개봉되면서, 눈에 띄지 않던 궁중의 한 기관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왕과 왕족들의 품위와 미(美)를 꾸미고 다듬어줬던 상의원. 이곳은 왕과 천민이 마주할 수 있었던 비밀스럽고 신비한 공간이었다. 천민이라도 상의원에서만큼은 그 능력에 따라 벼슬길이 열리고 신분상승까지 가능했다. 그렇기에 상의원은 천민들에게 꿈의 직장이 아니었을까.

상의원은 조선 태조 때 세워진 관청으로, 왕실에서 필요한 옷과 장신구 등의 수공예품을 만들어 진상하고 보관하던 곳이다. 경우에 따라 관원, 사신들에게 지급되는 물품도 공급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관복을 보수하거나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들을 위해 상의원에 소속된 장인의 수는 세종대왕 시절에 467명, 성종대에 597명이었으며,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들은 70여 명이나 되었다. 이 규모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경제적 여건으로 볼 때, 참으로 많은 인력이 왕실 사람들의 복식 제작에 투입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상의원은 고려시대에 임금의 옷을 담당하던 장복서(掌服署)를 계승하여 설치되었고, 고종 때 상의사(尙衣司)로, 다시 상방사(尙方司)로 명칭이 바뀌었다.

상의원

신분을 넘어 실력으로 인정받던 곳

왕실의 복식은 단순히 직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사·은사를 넣어 직접 직물을 짜는 것은 물론이고, 염색하고 빨고 풀먹이고 손질하는 일까지 그 과정이 많고 복잡하다. 천을 꿰매고, 수를 놓고 금박을 올리는 등 꾸미는 데에도 무수한 공이 들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는 관모류와 손에 드는 규(圭), 허리에 묶는 대(帶), 신발 등 다양한 부속물을 갖추었고, 격식에 맞는 보석들과 패물들을 장식해야 했다. 이처럼 상의원은 왕족을 꾸미고 다듬기에 총력을 기울였던 곳이다.

영화 <상의원>에서는 왕실 전담 의상실 정도로 묘사되지만 실은 더 많은 부분의 일을 처리하였다. 악기나 마구(馬具), 무기류까지 만들어 진상했다. 상의원 자체 생산품을 비롯해 각처에서 올라온 값비싼 진상품과 정교하고 귀한 수입품들이 재료로 쓰였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모두 모여 상의원에서 근무했는데, 천재 발명가 장영실도 이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천민에서 종5품 ‘기술직 공무원’으로 첫 벼슬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에 각각 상의원이 따로 있을 정도로 방대했던 조직은 종1품 관리가 총괄했다. 특히 경복궁에 있는 상의원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가까이에 위치해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유행을 전했던 아리따운 침선비

궁마다 바느질하는 침방과 수놓는 수방도 따로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침선비들은 왕과 왕비의 일상복과 속옷류를 중심으로 이부자리와 베개 등을 제작했다. 침선비는 7~8세의 나인 가운데 손재주가 야무지고 꼼꼼한 자를 가려 뽑아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업무 강도가 높아 손가락은 바늘에 찔린 상처로 성한 날이 없었고, 바느질을 못하면 그 책임을 물어 투옥되기도 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전문가들이었다.

침선비는 옷을 짓다가도 궁중 연회가 열리면 춤과 노래도 담당했다. 침선비의 다른 이름이 ‘상방(상의원의 다른 이름) 기생’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궁 안에 모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필요할 때마다 궁에 드나들면서 바느질을 했다. 일정량의 보수는 물론, 옷을 제작하는 능력과 일의 내용에 따라 별도의 공임을 받았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상도 주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침선비에게 유독 상을 많이 내린 임금이 있었으니 바로 폭군 연산군이다. 여색을 밝힌 탓에 자신이 총애한 장녹수와 기생들에게 줄 선물로 옷과 옷감을 들이라는 명령을 수시로 내렸고, 상방 기생들이 출연하는 연회를 자주 연 탓 아니었을까.

외모가 출중한 10대 아이들이 침선비로 선발되기도 했다. 19세기 ‘동고어초’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북상기』에는 18세의 천하절색으로 이름 높았던 기생 순옥이 지방에서 상의원 침선비로 뽑혀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양반의 지조를 지켜온 환갑노인 낙안선생이 가슴을 태웠다는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체로 침선비는 천민임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양반 부녀자와 같이 화려한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으며, 머리도 가발을 사용하는 등 사치가 극에 달했다. 이런 모습의 침선비는 뭇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은 여염집 아녀자는 물론 내로라하는 양반댁 마나님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새로운 왕실의 유행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상의원이 왕과 왕족들을 꾸미고 다듬는 일을 했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지만, 침선비가 왕실 주변의 아름다운 ‘창조물’을 보고, 궁 밖 세상에 전해 유행을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글‧송명견(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 일러스트‧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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