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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의궤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도침(搗砧)
작성자
황정연 연구사
게재일
2016-05-12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조회수
2142

 


  조선왕실문화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조선왕조 의궤(儀軌). ‘의궤’는 의식절차를 마차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매뉴얼을 일컬어 의궤라고 불렀다. 


  조선왕조 의궤가 흥미로운 점은 행사준비 과정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 날짜순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 외에, 오늘날 사라진 물품 제작공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돗자리, 방석, 썰매 등 소소한 물품의 제작과정을 살피다 보면 ‘도침’이라는 용어에 눈길이 멈춘다. 도침은 두드린다는 의미의 ‘도(搗)’자와 다듬잇돌을 뜻하는 ‘침(砧)’자가 합쳐진 말로 닥종이를 두드려 섬유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표면을 편평하게 만들어 종이가 질기고 보존성이 좋게 만드는 가공법을 일컫는다. 


  한 가지 왕실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이가 필요했다. 조정의 논의를 받아쓸 종이, 관청끼리 주고받을 문서, 장인이 설계하거나 도안을 그릴 종이, 의궤 제작에 사용할 종이 등...『경국대전』에 기록된 종이의 종류가 수십 종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종이의 쓰임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학자 서명응의 설명에 따르면 도침은 백여장 단위로 종이를 포개 앞뒤로 수백 번씩 돌로 두드려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왕실에서는 도침을 장인이 아닌 죄수들에게 맡겼다.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관청)에서 도침할 장소를 마련하면 죄수들이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종이를 두드렸다. 이들에게는 하루에 한 끼만 제공되었기 때문에 허기진 것은 다반사였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장소에서 수백, 수천장의 종이를 두드리다 보면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곧 도침은 조선시대 죄인을 다스리기 위한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행여 신분이 낮은 사람이 도침에 동원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조선초기에는 관료와 내시, 심지어 왕의 혈족인 종친도 잘못을 저지르면 도침장에 끌려나와 종이를 두드리며 참회하도록 하였다. 도침이 끝난 종이는 조지서의 관원과 숙련된 책장(冊匠)이 이상이 없는지를 철저하게 검사하였다.


  이렇듯 조선백성들이 흘린 눈물과 땀은 의궤 속 종이가 오늘날까지 변색되지 않고 견고하게 버티게 된 힘이 되었다. 의궤를 숭고한 예술품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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