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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효 사상 계승하는 한국 정원
작성자
이원호 연구사
게재일
2017-02-02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조회수
1549

 


  올해도 이른 설명절 귀성전쟁이 막을 내렸다. 평소 거리의 2~3배가 족히 걸리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길을 나서는 가족들에게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와 같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산업사회가 도래한 뒤 나타난 전세계적 추세이다. 그러나 명절에 고향을 찾아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장관이 펼쳐지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 등이 유독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는 6.25동란 이후 본격적으로 집단귀성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민족적 귀소본능의 이유는 무엇일까? 부모님이나 가족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는 행동은 유교의 기본덕목인‘효’와 관련지을 수 있다. 원래 ‘효’는 신분질서에 따른 상-하, 존-비의 윤리로 단순히 부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분에 따라, 그 직분에 따라 이상적으로 몸소 정진하는 것을 일컫는다.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숭배, 남녀유별, 장유유서, 상하관계를 고려한 위계성이 반영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상류주택과 정원의 구조에서도 신분에 따라 공간을 구분 짓는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정원의 대표격인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의 공간구조는 이러한 위계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소쇄원 48영에서 나타나는 소쇄원의 모습은 가장 높은 단에 위치한 주인의 거처인 제월당과 화계, 손님들을 위한 공간인 광풍각, 주변에 위치한 계류와 석물, 수목 등이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면서 영역의 주체를 배려한 공간구성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소쇄원의 조영자는 양산보(梁山甫, 1503-1557)로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이후 세상에 뜻을 잃고 자신의 본가 일대에 은거하고자 정원을 조성한데서 기원하였다.


  양산보가 지은 『효부』는 천지만물 사이에서 인간이 생겨남과 모든 천륜의 근원이 부모로부터 비롯됨을 말하고 효도의 당연함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 여파로 인해 정계로 나가지 못하고 소학의 가르침을 효도로 실천하며 주변 인물들과 함께 교유하는 공간으로써 소쇄원을 조영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국정원에 내재된 효의 사상은 후손들의 실천적 태도로도 나타난다. 소쇄원이 전란에 의해 소실되자 양천운 대에 중수를 시작하고 그의 손자인 양진태, 양택지 대에 이르러 과거의 정원 모습을 회복하였으며, 양경지는 소쇄원의 외원을 설정하는 등 조영 이래 2차례의 대규모 정원 조성사업과 1차례의 확장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양천운은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瀟灑園溪堂重修上梁文)』에 ‘반드시 복구해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오늘에까지 이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라고 밝히고 있고 양경지의 공간 확장 시에도 양산보의 원래 내원공간을 그대로 존치하고 외원을 확대하는 등 선대의 공간을 존중하여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았다. 또 양자징과 양자정이 자신들의 공간인 각각 고암정사와 부훤당을 조성한 장소도 기존의 공간구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건물만 소박하게 짓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혈족위주의 정원계승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치 않은 현상이다. 양산보의 후손들 중 퇴락한 정원의 회복을 꾀한 인물은 입신양명한 인물들 위주였다. 소쇄원에 관련된 인물들의 가족사를 통해서도 한국의 효가 오롯이 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쇄원 이외에 대다수의 조선시대 별서정원에도 효와 관련된 정자명과 일화가 전해오고 있어 한국정원의 효사상을 일깨워 준다.


설명사진


<소쇄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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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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