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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신라인과 석빙고
작성자
이은석 연구관
게재일
2016-11-17
주관부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회수
1138

 


  중세시대 예루살렘 근처 사막에서 포로로 잡힌 십자군 장군이 얼음 물잔을 들이키는 장면이 ‘킹덤오브헤븐’이란 영화에 등장한다. 당시 얼음을 어디서 가져오고 어떻게 보관했는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지증왕때인 505년에 얼음을 저장하게 한 기록이 등장하고,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때 한양에서는 제향·불공 등에 사용하는 얼음은 동빙고, 왕실용·손님접대·관리지급용은 서빙고에서, 지방 군현의 경우 하천변에 빙고를 만들어 운영했다고 한다. 18세기에 축조되어 전래되는 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석빙고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간간히 발굴되는 삼국시대 빙고는 하천변에 흙 구덩이를 넓게 파고 한쪽을 약간 낮게 만든 후 지하식의 긴 배수로를 연결하여 온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 안에 얼음을 넣고, 쌀겨로 채운 후 지붕을 덮으면 여름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부여 구드래에서는 백제와 조선시대 빙고가 발굴되었고 근래까지 빙고리로 불리워졌다.


  최근 경주 남천변의 김유신장군의 종택이라고 알려진 ‘재매정’에서 돌로 만든 빙고가 발굴되어 주목되고 있다.(사진) 재매정은 왕궁인 월성 서편에 옛 우물터가 남아있는 곳으로 1872년에 세워진 비각이 있다. 남쪽 하천가에 만들어진 석빙고는 내부 중앙으로 물이 빠지는 ‘十’자형의 시설이 바깥으로 빠지는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다.


  김유신은 선덕여왕 13년(644)에 백제의 일곱 성을 공격한 후 이듬해 정월에 돌아왔다. 그러나 백제 대군이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고 출전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다시 위급해졌다. 김유신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을 지나쳐 50보쯤 되는 곳에서 말을 멈추고, 하인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전쟁터로 다시 나아갔다고 한다. 만약 당시 날씨가 더웠다면 얼음을 동동 띄워 장군께 드렸음직도 상상해 본다.


  경주 월성과 남천 주변을 발굴하면 더 많은 빙고가 확인되리라 기대된다. 조선시대때 중요 관리와 종친 뿐만 아니라 환자와 감옥의 죄수에게도 얼음을 지급했다고 하니 더운 여름에 얼마나 시원했을까? 선조들의 애민정신을 되새김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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