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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경주 월성 해자 개훍서 건진 1500년 전 신라 생활상
작성자
박윤정 연구관
게재일
2017-08-11
주관부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회수
1606


  ‘해자(垓子)’는 궁성 밖 둘레에 파 놓은 물도랑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을 일컫는다. 신라 천년을 지속했던 궁성인 경주 월성(月城)에도 ‘해자’가 있었다. 월성해자는 1984년 월성 주변지역 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으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전모가 확인되었다. 특히 이번 월성해자 발굴조사에서는 신라시대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주목되고 있다.


  발굴 전 해자 내부에는 두껍게 개흙이 남아있었다. 개흙(뻘층)은 미끈미끈하고 고와서 밀도가 높아 외부의 산소를 차단시킨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보통의 발굴조사 현장이라면 썩어서 이미 흔적없이 사라져버렸을 수많은 유기물과 유기물로 만든 유물이 남아있었다. 바닷가의 갯벌을 ‘생명의 보고’라고 일컫는 것처럼 발굴조사 현장의 두꺼운 개흙은 ‘고고학의 보고’이다.


  이런 뻘층 덕분에 나무를 깎아 그 면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나 1500여년 전의 신라 사람이 사용했던 빗, 국자, 칠기, 자 등 나무로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멧돼지, 개, 소, 말, 사슴, 곰 그리고 바다어류인 강치 등의 동물 뼈도 현재까지 남아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양의 식물 씨앗도 출토되었는데, 복숭아, 가래, 자두, 포도, 참외, 가시연꽃 등 확인된 씨앗의 종류만도 30여종에 이른다.  숯처럼 탄화된 곡물, 주로 쌀과 밀이 다수이며 콩도 확인되었다.


  이처럼 뻘층에서 출토된 여러 유기물과 유기물로 만들어진 유물은 기와나 토기 등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 속의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신라시대 사람은 무엇을 주식으로 먹었는지, 어떤 육류와 채소를 먹었는지, 그리고 월성 주변에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뻘층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신라시대의 생활모습과 월성주변의 경관을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뻘층이 산소를 차단해 유물의 부식을 막고 그 형태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호미나 트라울(발굴도구)로 흙을 파내는 통상적인 발굴만으로는 찾기가 쉽지 않다. 해자 발굴조사 현장 서편 끝에는 파란색 천막으로 덮여있는 흙을 볼 수 있다. 이 흙은 해자 내부의 뻘층의 개흙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이렇게 쌓아둔 흙을 모두 체를 통해 걸러내어 알갱이만한 작은 유물까지도 놓치지 않고, 찾고자 하였다.


  물 체질은 구멍이 매우 촘촘한 채반 위에 개흙을 올려놓고, 채반을 물속에 넣어 개흙을 씻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면 숨어 있던 여러 씨앗과 탄화된 곡물, 그리고 알갱이만한 유물이 서서히 드러난다. 마치 모래 속에서 사금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발굴조사 현장에서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신라 역사의 조각이 채반 속에서 확인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 고고학자는 천오백여년 전으로 거슬러가는 시간여행의 퍼즐을 조금씩 맞추어간다.


설명사진


<신라의 생활상을 말해주는 월성 발굴현장 뻘층에서 나온 각종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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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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