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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풍납토성 미래마을과 백제왕궁 유적 출토 갑골(甲骨)
작성일
2009-01-0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40



풍납토성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홍수 때이며 그 후 도시화된 토성 안에서 1997년 1월 아파트 공사시 필자에 의하여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도 풍납토성을 통해 많은 한성백제 시기의 문화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어 잃어버린 백제전기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풍납토성 발굴의 시작 서울 송파구 풍납동 197번지 일대 이른바 미래마을은 풍납토성風納土城 내 서쪽 한강변 쪽으로 서벽에 임한 약 1,652.9m²에 이르는 지역에 2~3층 연립주택이 빼곡히 들어찬 주거지역이다. 당시 재건축 붐이 한창 일 때 이곳 주민들은 조합을 형성하고 고층아파트를 짓기 위하여 서울시에 재건축 허가를 얻어놓고 신축공사 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1월, 풍납동 231번지 일대 현대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에는 풍납토성 내에서 행해지는 건축행위는 당국에서 ‘선 발굴 후 개발’을 원칙으로 정해졌다.

2000년 5월 16일에는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보존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훈령이 있은 다음 사적으로 지정 공고되고 곧바로 이곳 미래마을도 이 조치에 따라 먼저 발굴하게 되었다. 이 해 11월 16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첫 번째 발굴 현장 설명회 때 약 1,652.9m² 면적의 발굴장 안에는 한 평 남짓한 곳에서 별것도 아닐 것 같은 기왓장 몇 조각만 보일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대지처럼 보였다. 당시 주민들이 보기엔 수십 년을 살아온 집터에서 출토된 몇 장의 기와 조각 때문에 자기들이 살던 집터에 다시 집을 짓지 못하고 졸지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굴 지도위원이나 문화재위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몇 장의 기와 조각이 백제시기의 기와로 밝혀지자 결국 그 곳을 사적으로 보존하도록 결론을 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4년 2차 발굴을 실시하였다. 2000년 시굴 당시 약간의 기와조각들이 노출되었던 바로 그곳에서 대량의 기와 편(약 5,000점)이 기적처럼 발견되었다. 시굴 당시 몇 점의 기와 조각만 드러났던 곳에서 실제로 기와 퇴적 구덩이가 발굴되어 주민들의 우려를 다소나마 불식시킬 수 있었다. 백제시기 왕궁 건물에 덮었을 기와들이었다. 이외에도 대형 건물지나 저장 구덩이들이 매번 발굴할 때마다 중요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발굴자들이나 전문가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였다. 2006년, 미래마을 발굴에서는 바닥을 여러 겹으로 다지고, 그 위에 자갈을 깔고, 복판에는 납작한 판석을 깐 도로가 발견되었다. 공방이나 창고 저장 구덩이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에서 이렇게 정교하고 노폭이 큰 도로가 부설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궁성 안의 도로계획의 일단을 알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시설물이다. 2007년은 1997년 1월 송파구 풍납토성 내 풍납동 231번지 일대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처음 발견 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백제왕궁 유적 발견 10주년을 맞아 6월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려던 회의장을 풍납동 주민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태평로 프레스센터로 장소를 옮겨 간신히 보고회 정도로만 마치기도 하였다. 2008년에 재개된 2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미래마을의 역사적 성과를 크게 높이게 되었다. 지난 6월에는 미래마을 서쪽의 대형 건물지 안에서 소의 견갑골(크기 34cm)에 7~8개의 낮은 홈을 파고 불을 지져 점을 쳤던 흔적이 있는 갑골甲骨이 발견되었다. 점占을 쳤던 흔적, 갑골의 발견 갑골은 고대 동양사회에서 대개 정치적인 목적으로 점占을 쳤던 유물이다. 갑골은 일명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짐승의 견갑골(어깨뼈)이나 거북이 배 바닥 껍질을 이용하여 불을 지져 반대 면에 균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길흉이나 가부를 결정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고대사회의 왕이나 수장들이 신탁神託을 빌어 정치적인 목적으로 많이 활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슴이나 돼지의 견갑골을 이용한 갑골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 적이 있지만 소의 견갑골에 점복을 친 흔적이 있는 복골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풍납토성 백제왕궁 유적에서 소 견갑골 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문헌기록으로 본 백제의 갑골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소 어깨뼈와 거북이 배 바닥으로 점占을 치는 갑골은 동이계東夷系의 전형적인 습속이다. 1962년, 중국 동북부 후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B.C.3500~B.C.3000년의 복골이 처음 출토됐다. 이후 은殷나라에서 갑골문자를 만들어 내는 등 찬란한 갑골문화를 창조했고 그 전통이 부여-백제로 이어졌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국가의 제사와 전쟁이 있을 때는 소의 발굽 뼈로 점을 친 기록이 중국문헌에 보인다. 필자는 일찍이 문헌자료를 통하여 백제나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갑골습속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정을 한 바 있었는데, 이번에 그 실물(갑골)이 풍납토성 미래마을 백제왕궁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한원翰苑』에는「위략魏略」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풍속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 뼈를 관찰하여 길하고, 흉함을 판단한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점복 습속이 부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조와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태종 춘추공조에 보면 부여의 왕궁 안에서(땅을 파니) 거북이 하나가 나왔는데, 거북이 배면에 “有一龜 其背有文”이라고 쓴 ‘구배문龜背文’이 보여 의자왕이 점을 치는 전문 점인으로 하여금 점괘를 판정하도록 한 기사로, 일종의 복사卜辭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백제에서도 점복 습속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 문헌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서도 부여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점복을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 초 경남 김해시 부원동 유적에서 출토된 삼한시대의 복골(卜骨, 갑골의 일종)이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이후 전남 해남군 군곡리 패총에서 철기시대 내지 마한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다. 이후 각지에서 계속 출토되고 있다. 금강유역에서 3, 4세기 경의 복골이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전북 군산시 여방동 남전 패총에서 3, 4세기 경의 복골(짐승의 견갑골)이 발견되었다. 마한 사회나 백제 초기사회에서도 강력한 지배층에 의한 정치가 존재했음이 복골의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갑골은 중국 은殷나라에서 성행했지만 주나라에서도 종종 갑골을 사용했던 흔적이 보인다. 유교문화와 노장사상이 발달하여 왕도정치가 정착된 한漢나라에서도 갑골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기』에 보면 「고조본기」에 진나라 말기의 난세에 유비劉備를 돕던 여러 원로들이 한결같이 유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비롭고 기이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 후일 필히 귀인이 될 것이라고 하여 점을 쳤는데 유계(劉季 즉, 유비)만큼 최고로 길吉한 사람이 없다고 점괘가 나왔다. 아마 유비가 원로들의 추대를 극구 사양하여 복서卜筮를 쳐보니 유비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어 패공(沛公, 지금의 하남성 패현의 수장)에 추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승승장구, 마침내 한나라 시조 즉, 고조高祖가 되었다. 그리고 한 고조의 서자인 유항劉恒이 대왕(代王, 지금의 산서성 태원의 수장)으로 있을 때 섭정을 하고 있던 여후呂后가 죽고 왕정이 어수선할 때 제신들이 유항을 황제로 추대하니 유황은 극구 사양하자 최후 수단으로 복인卜人으로 하여금 구복龜卜을 쳐서 점괘가 천자天子가 될 것이라고 나오자 모두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이가 곧, 한나라 제3대 문제文帝이다. 왕도정치가 이미 정착되었던 고대 중국에서 한漢나라의 시조와 초기 제국의 기틀을 닦은 황제를 추대하는데 점복을 쳐서 신탁神託을 빌어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신라 제2대왕 남해차차웅이 무인巫人이었다는 사실과 가야의 김수로를 시조 왕으로 추대할 때 점복을 치는 과정을 읊은 ‘구지가龜旨歌’의 『삼국유사』의 기술을 통해서 표출된 것과 같다. 여기서 ‘구지’는 즉, ‘거북이의 뜻’이다. 특히 1981년, 가야의 수도인 경남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사슴의 견갑골로 점을 친 갑골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문헌기록을 고고학 성과를 통하여 실제로 증명해 준 바 있다. 백제왕궁이란 또 하나의 물증, 소 견갑골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고대사회에서 점복을 쳐서 왕을 추대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풍납토성 미래마을 백제 왕궁 유적에서 발견된 갑골도 이러한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데 점복을 쳤던 유물이 아닌가 추측된다. 갑골은 은나라에서도 왕궁이나 지배층에서 주로 정치적인 목적으로 소 견갑골이나 거북이 배 바닥을 사용하여 점복을 쳤는데, 소 견갑골은 주로 은나라 수도였던 은허殷墟에서 출토되었다. 풍납토성에서 소 견갑골의 갑골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풍납토성이 곧, 백제왕궁이란 사실을 증명해주는 또 하나의 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미래마을 발굴에서 도로와 수 십 동의 창고 건물지가 발굴되고 창고 안에서는 대형 술독이 발굴되었다. 미래마을 지역은 주거지 창고 공방이 밀집하고 있는 지역이다. 앞으로 풍납토성 백제왕궁 유적에서는 궁궐유적과 궁중유물들이 속속 발굴될 것이다. 그리고 풍납토성 내 경당유적에서 재개된 발굴에서도 대형 궁궐 건물지와 목조와 석조로 결구한 대형 우물이 발굴됐고, 많은 시유도기가 발굴되는 등 더 많은 한성백제 시기의 문화 유적이 발굴될 것이다. 문화재 발굴은 잠자고 있던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일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합심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하루 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문화재 보전책과 더불어 주민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적절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주의 신라 왕경 유적이나 부여의 사비시기 백제 왕궁 유적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발굴 정비하는 것처럼 풍납토성의 한성백제 시기의 왕궁 유적도 장기적인 발굴조사 계획과 왕궁 유적 보존 대책을 수립하여 잃어버린 백제전기의 역사를 복원해 내야 할 것이다. ⊙ 글·사진 | 이형구 문화재위원,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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