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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외교적 역량으로 국난 극복에 기여하다
작성일
2021-09-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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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이덕형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 한국 현대사의 전개 과정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역사와도 일면 유사성이 있다. 1592년 한·중·일 모두가 전쟁에 나선 임진왜란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를 대신해 후금이 성장하면서 동북아의 긴장 상태가 고조된 선조, 광해군 시대. 국방 대비와 내부 결속 이외 이 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국제적 긴장 상태를 풀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이었다.


이덕형은 1588년(선조 14) 이조정랑의 직책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왜사(倭使) 게이테쓰 겐소 등과 회담했다. 그 후에도 외교적 자질을 인정받아 임진왜란 전후 중요한 외교 문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좌의정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란 대책 수립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적진에서 왜군과 직접 협상하였고, 왜군이 대동강 지역까지 진격하자 이덕형은 겐소와 회담을 통해 선조가 피란길에 오르는 시간을 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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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반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 원군 파병 요청을 건의하였고, 청원사(請援使)로 직접 명나라로 가서 원군 출병을 성사시켰다. 특히 명나라 지휘관 이여송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줄곧 행동을 같이하며 조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1593년 4월 한양 수복 후에는 형조판서로 한양의 복구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전쟁 시기 류성룡의 제안으로 창설된 훈련도감의 부제조로 있으면서, 전쟁 중 명군에게서 습득한 화약, 화포, 독약 제조법을 전수하여 기술자를 길러내고 병기를 제조하여 경기도 일원의 진지에 배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흥복군(興復軍)에 배속해 이를 지휘하였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왜군이 물러난 후에는 호남을 안정시키는 일을 맡았다. 1598년 10월에는 좌의정에 올라 우의정 이항복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613년(광해군 5) 10월의 이덕형 졸기(卒記:사후에 인물의 행적을 정리하여 쓴 기록)에는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라고 기록하여 그의 외교적 역량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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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이원익의 외교 활동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여 선조를 수행하며 피란길에 올랐다. 선조가 평양에 있을 때 이원익은 평안도 지역의 이반된 민심 수습과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량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군의 북진이 빨라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길을 서둘렀다. 그 당시 이원익은 영의정으로 있던 류성룡과 함께 왕이 평양성을 사수할 것을 간곡히 청했지만, 선조의 의주 피란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시기 이원익은 이덕형과 더불어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의 파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뛰어난 한어(漢語 : 중국어) 실력으로, 조선의 형편을 정확히 명나라에 전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원익과 이경석이 모두 한어를 해득하였으므로, 제조가 되어 사역원 관원이 오면 반드시 한어로 응대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원익은 군량 및 군수품 조달을 독려하여 제독부로 운송하도록 하였고, 명나라부터 화포 등에 관련한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의 전사자를 위하여 기자묘(箕子墓)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부의물(賻儀物)을 내려 명군을 위로하고 그들의 사기 진작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598년 7월 좌의정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영의정으로 승진한 후에는 전후 복구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1599년 5월에는 영의정에서 물러나 동호(東湖)에 일시 거주했으나, 9월에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선조 후반 북인이 주도하는 정국이 전개되자, 사직을 청하고 경기도 시흥 금양리(衿陽里: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도체찰사를 맡으면서 국가가 필요한 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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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 다시 불러오고 싶은 인물

이덕형과 이원익은 조선 중기 외침이 잦았던 격변의 시기에 정승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특히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서 그 능력을 발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과 일본 진영을 오가는 사신이 되어 일본 측 적장들과 강화를 교섭하였고,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조달하고, 훈련도감에서 병기 제작을 감독하고 산성을 수축하여 왜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에도 이들은 전후 복구와 국방, 외교 분야 전문가로서 큰 활약을 했다. 광해군의 책봉을 실현시켰고, 조문과 책봉 사절로 온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하여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높여 갔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당파 간의 대립이 치열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동인과 서인의 핵심으로 활약하는 당인(黨人)들도 있었지만, 이덕형과 이원익처럼 관료적 자질을 바탕으로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관료도 있었다. 현재의 국내외적 상황이 순탄하지 않아서일까? 균형 잡힌 정치 감각과 뛰어난 외교 역량을 보였던 이덕형과 이원익의 자질을 우리 시대에 더욱 되살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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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참모로 산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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