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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조선시대 정원 드림팀
작성자
이원호 연구사
게재일
2017-06-29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조회수
2428


  오래된 정원을 보면 세월이 묵은 흔적이 도시의 삭막함을 밀쳐내고 자연 속에 묻힌 간결한 공간은 시적 상상력을 자아낸다. 이 편안함에 오감을 맡기고 있자면 문득, 이곳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태초의 정원인 에덴동산은 신이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요즘의 정원은 설계가와 시공자가 따로 있고 직업 조경가도 많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원은 주인은 있지만 누가 밑그림을 그렸고 어떻게 연못을 만들었는지 오리무중이다. 정원을 여럿 만든 유명한 정원가는 중국과 일본에 흔하게 나타난다. 중국 명나라 때 계성의 『원야』에 보면 정원을 시공하는 장인보다 주인인 설계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했을 만큼 다른 나라에선 일반적인 사회현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정원을 만든 최고의 드림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로 면앙 송순(1493-1583), 하서 김인후(1510-1560), 소쇄옹 양산보(1503-1557)이다. 송순은 면앙정을 조성하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김인후는 인종의 스승으로 당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다. 이들은 학문적 교우이면서 친인척관계로 조선중기 대표적 정원인 소쇄원(명승 제40호)의 조성에 드림팀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각자의 역할을 보면 송순은 정원공사 자금을 댄 투자자이자 자문역할을 했고 양산보는 정원설계와 시공을 맡았으며 김인후는 활용 프로그램 전문가였다.


  송순은 관찰사로 있을 때 소쇄원의 증축에 소요되는 재물을 지원했는데 나중에 그가 면앙정을 지을 때 양산보가 돕기도 했다. 양산보는 고경명의 시에 보면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고 매화나무를 직접 심는 등 조성에 직접 참여한 정원가였다. 20대에 초정인 소쇄정을 시작으로 40대에 지금의 정원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김인후는 성리학적 소양과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 『소쇄원 48영시』를 짓고 『소쇄원도』를 탄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목판본은 당시 정원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화면서도 각 정원공간에서의 행위와 함께 오감을 통해 집약된 상징성을 담고 있다. 소쇄원도는 당시 문인화의 산물로 유행했던 산거도, 별서도, 제택도 같은 그림과도 차별된다. 후손들은『소쇄원도』의 가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원림의 천석이 변천될 뻔하다가 이 원도가 그려져서 전해지게 되었으니(중략), 이후 여기를 보는 사람들은 이 원도를 근거삼아 우리 선조의 숨어 지내며 쌓은 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소쇄원사실 발문 중에서; 김덕진, 2011).’ 특히 소쇄원은 산수화의 전체 구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저 바라만 보는 정원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 속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정원 즉 시경의 경지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김인후는 정원시를 통해 소쇄원에 꽃과 나무, 바위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직접 담당했다. 호남가사문학의 산실이기도 한 담양에서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3명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시대 전통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낸 것이다.


설명사진


<소쇄원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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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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