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역사문화도시 강릉에서 만난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작성일
2016-03-03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394

역사문화도시 강릉에서 만난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역사문화유산은 시대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기후도 지형도 바뀌었지만 우리는 이같은 이정표를 붙잡고 시간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강릉처럼 오래된 도시의 문화유산은 역사의 긴 프로세스 속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는 창구 역할을 하고, 우리로 하여금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토대가 된다. 백두대간이 도도히 흐르는 한반도 중앙의 동해안가에 자리 잡은 강릉은 오랫동안 북방과 남방문화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임영관 삼문은 역사문화도시 강릉의 한가운데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유서 깊은 문화의 단면을 담은 ‘객사’

강릉의 객사였던 임영관의 삼문은 주 건축들이 헐리고 없어진 터에 홀로 남아 지나간 역사를 증언하며 오랜 세월 외롭게 서있었다. 문 안쪽의 공간에서 행해지던 문화는 암호처럼 남아 지워졌지만 20세기 후반 우리는 강릉 지방의 유서 깊은 문화의 단면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에 의해 쌓이고 이어진다. 실물로 남은 건축은 중요한 역사의 기록이자 상징이 된다. 건립 당시의 미학과 기술 수준은 물론 공간 사용의 규약과 질서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당시 문화를 총체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강릉 객사문’으로 오랫동안 불리다가 2014년 ‘강릉 임영관 삼문’으로 개칭된 이 건축은 드물게 남아 있는 고려 말 건축의 하나로, 강원도 내 목조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임영관 삼문은 강릉부 객사의 대문으로, 고려 태조 19년에 창건되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삼문은 고려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청 된다. 임영관이라는 제액은 공민왕이 하였다고 전하며, 임영관 철거 시 삼문에 옮겨 달았다고 한다.

객사는 중앙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정청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지방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이 객사는 중앙에서부터 임금의 뜻을 받들고 내려온 관료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건물이기도 했다. 객사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를 모신 감이 있는 주사(主舍)를 중심으로 동서 좌우에 익사가 놓이고 외삼문과 내삼문을 거쳐 깊숙이 자리 잡으며, 부엌, 곳간, 온돌방으로 구성된 고직사가 조성되었다. 주변에 휴식과 여흥을 위한 누정들을 조성하고, 대부분 관아와 함께 하며, 각 지방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오늘에 이르기 위한 보수와 정비의 과정

강릉부 객사는 총 83칸의 규모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이 삼문만이 남게 되었었으며, 이 시기 삼문마저도 해체 수리하며 하부 구조가 변형되었다. 객사의 헐려진 건축의 부재 중 일부는 강릉 남산의 오성정, 금산의 월화정, 경포의 방해정 건립에 쓰였다고 한다. 일찍이 건축의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강릉 시청이 임영관지 앞에 자리 잡고 시청 청사의 확장으로 강릉 임영관 삼문은 오랫동안 시청사의 뒤편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20세기 말부터 역사문화유산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도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문화재청과 강릉시의 노력으로 강릉 시청사는 신축 이전하고 이 지역은 일부 복원 정비되어 오늘에 이른다.

임영관 삼문은 2001년 구조 부재가 일부 부식되고 변형이 일어나 해체보수가 결정되었다. 해체 보수가 신중히 진행되는 동안 일제강점기에 시공된 콘크리트 기초가 확인되어 다시 전통 방식의 기초로 복구하였으며 구조적 성능을 할 수 없는 부재들은 일부 교체되었다. 해체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세세히 기록되었으며, 보수 과정에서 부재의 보존처리와 재사용, 신부재의 사용 등 보존 철학과 원칙에 대한 많은 논의를 거쳐 보수되었다.

이 삼문은 남향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으로, 길게 뻗은 장연의 맞배지붕과 함께 전체적으로 간결하나 위엄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판문이 설치된 중앙의 기둥은 각주로 하고, 자연석 주초 위의 전후열의 기둥은 배흘림이 강한 원주로 된 독립 기둥으로 건축 전체의 인상을 결정하고 있다. 필요한 공간을 간결한 부재와 구성으로 완결시킨 이 건축에는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영조척이 쓰였고, 기둥 위로부터 높이의 1/3 지점이 가장 직경이 큰 배흘림이 사용되어 당시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비례감과 조형감 등 단아하면서도 안정감을 가진 이문은 쇠서, 첨차, 화반, 보 등 고려시대 건축의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주두와 소로는 고려시대 주심포계의 건축에서 보여 지는 곡면으로 처리된 주두굽과 굽받침으로 되어 있고, 첨차의 배면도 연속연화무늬의 쌍S자 곡선으로 처리하여 구조부재지만 형태의 미를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글‧박경립(강원대학교 도시건축학부 교수) 사진‧문화재청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