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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 시대 혼례가구 동뢰연(同牢宴)을 중심으로
작성일
2022-12-29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69

조선 시대 혼례가구 동뢰연(同牢宴)을 중심으로 혼례는 관혼상제의 전통 의례 중에서, 오늘날에도 그 옛 모습을 남기고 있는 일생 의례 중 하나이다. 혼례의 시작은 문헌 기록에 삼국시대부터 나타나지만, 그 시작은 훨씬 더 이르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손을 번창시키고 국가의 구성원을 양성하기 위한 ‘가족’이라는 제도가 생겨나면서, 혼인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통례로서, 그 일정한 규례가 정립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01.혼인 60주년 기념 잔치(교배례) 조선후기, 세로 37.9cm, 가로 2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 6375)

가구 배치도 그림으로 기록된 왕실의 동뢰연 행사기록

전통적 혼례는 『예기(禮記)』의 육례(六禮)와 『사례편람(四禮便覽)』을 근거로 하여, 왕실과 사대부가 혹은 전국의 민가에서 계층과 지방의 특색을 가지고 다양하게 변화하며 전개 되었다. 혼례의식은 초례와 친영 등의 대표적인 의식을 비롯하여 단계별로 치러졌는데, 조선의 법전인 국조오례의에 그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일생에 큰 행사이며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의례였기 때문에, 혼례에서는 반상(班常)의 사회 제약적인 신분 차별을 넘어서 신랑은 흉배를 단 관복을 입고 신부는 공주나 옹주의 예복이었던 활옷을 입었다. 그렇다면 혼례 공간에서 사용된 가구들은 어떠했을까.


혼례에서 주목되는 장면은 초례 즉 동뢰연이다. 신랑과 신부가 마주하여 절을 하는 교배례(交拜禮)와 술을 나눠 마시는 합근례(合巹禮)가 그 주요의식이 된다. 왕실의 동뢰연은 가례도감의궤에 자세한 행사기록이 남겨져 있다. 가례도감 의궤에 동뢰연의 가구 배치도 그림으로 기록해 두었다(그림 3). 붉은 천을 덮은 연회용 테이블 여러 개가 각각 정해진 위치에 놓이게 되고, 신랑과 신부의 위치에는 연회용 테이블이 각각 하나씩 놓이게 되며, 과반과 원반, 옥동자와 촛대를 올려둔 향좌아(香佐兒, 비교적 좁은 윗면을 하고 조각과 화려한 곡선의 높은 다리를 붙인 연회용 탁자), 향꽂이로 쓰이는 옥동자 한 쌍, 대형 소형 촛대, 술잔을 놓는 용도로 쓰인 주탁(酒卓), 즉 대주정(大酒停)과 소주정(小酒停), 꽃을 꽂은 청화백자를 올려둔 준화상(樽花床) 등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큰 연회를 열게 되면, 오늘날과 같이 높은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차려지고, 화려한 꽃으로 장식도 하였다. 꽃들은 채색한 비단과 종이로 만들어져 상위에 음식과 어우러져 상화(床花)라고 하였다.


02.혼인 60주년 기념 잔치(헌수례) 조선후기, 세로 37.9cm, 가로 2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 6375) 03.동뢰연도, (순조2년, 1802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奎13122>

회혼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가의 혼례가구

이와 비교하여 문헌기록에서 사가(私家)의 혼례에서 사용된 가구들과 기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혼례 후 60년이 지나 다시 혼례를 치르는 회혼례를 기록한 회화작품에서 그 모습을 일부 볼 수 있다. 회혼례는 특히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독특한 문화로 17세기 초를 시작으로 18세기에 정착되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된 독특한 풍습이다.


장수하여 자손들이 다시 혼례를 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당시 회혼례는 매우 기념할 행사였으며, 조선 왕실에서는 회혼례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부부가 혼례를 치르고 나서 일주갑(一周甲)을 맞이하여 치르는 회혼례는 가정의 평안과 자손의 번창, 노부모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으로 자손들에 의해 행해졌던 만큼, 기념시를 담은책이 만들어지거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 것이다. 회혼례는 초례를 하되 남자 집안에서 하는 친영 대신에 자손들의 헌수례(獻壽禮)를 받는 의식으로 이어지는데, 앞서 본 왕실의 동뢰연도와 비교할 수 있는 합근례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회혼례도는 많지 않다.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도서관(The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at Yale University) 소장의 <요화노인회근첩(澆花老人回巹帖)>(1848년), 홍익대학교 소장 8첩 병풍 <회혼례도>(185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혼례도첩》, 평생도 중에 그려지는 회혼례가 있다. 그중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회혼례도첩》은 세부 표현이 상세한 기록화로서 주목된다. 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조선 후기 혼례도첩을 통해, 사가에서 행했던 혼례의식 중 교배례, 헌수례, 하객접객도, 중뢰연도 등의 장면이 확인된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회혼례도첩》의 원형 복원 모사도 제작하여 그림을 더욱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 1>에서 보는 장면은 교배례의 장면으로, 즉 <그림 3>의 왕실에서 동뢰연이 열리는 장소의 가구와 비교해볼 수 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역시 천을 두른 높은 연회용 테이블이 놓였는데, 왕실에서는 국조오례의 내용과 같이 신랑과 신부 앞에 각각 하나의 테이블[饌案]을 놓았던 반면에 사가에서는 하나만 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차이점은 그 외에도 보인다.


<그림 3>에서는 술잔을 놓을 탁자, 즉 ‘주탁(酒卓, 대주정 혹은 소주정)’도 다리가 높은 형태로 제작되었고, 향꽂이로 쓸 옥동자도 두드러진다. <그림 1>에서 보는 사가의 혼례에서는 주탁 대신에 낮은 소반이 사용되었고, 향 꽂이를 쓸 옥동자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촛대를 올려놓는 가구를 보면 붉은색을 칠하고 화려한 곡선의 다리를 한 향좌아의 형태로 사가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일상생활과는 확연하게 구별됨이 보인다. 그것은 <그림 2>에서도 보인다. 혼례를 치르는 만큼 소반 역시 왕실 잔치에서 높은 관직에 있는 내빈에게 진설되었던 구름무늬 형태의 다리를 한 운족반(雲足盤)이 각 손님 앞에 놓여있음을 볼 수 있다.


회혼례의 모습이지만 초례의 모습을 재현했던 만큼 우리는 사가에서 이뤄진 혼례가구의 모습을 일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천을 두른 높은 사각의 연회테이블이나 붉은 칠과 곡선 다리를 한 화려한 향좌아나 운족반의 사용은 혼례가구 역시 혼례복과 마찬가지로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사용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더불어서 주탁을 소반으로 대체하고, 신랑과 신부 사이에 찬안상을 하나만 차리는 것은 사가의 의례에 사용된 가구의 변화를 보여주며, 일반 사가에서 행해진 의례의 장면이 마치 영상으로 재현되듯 생동감 있게 전해져서 보는 이들에게 매우 흥미로움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 박정혜, 혼인한 지 60년 다시 치르는 혼례, 조선 시대 사가기록화 옛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 2022년 국립대구박물관 학술심포지엄 회혼례도첩의 문화사적 이해, 국립대구박물관.




글, 사진. 김미라(인천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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