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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고속 시대의 문제와 해결책
작성일
2013-04-1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3387



어지러운 속도로 멀미나는 시대

눈만 뜨면 ‘빠름- 빠름-’하는 노랫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초고속시대이다. 당장 길거리에 나가 보면 실감이 난다. 사방으로 죽죽뻗은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 도로 위를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는 쇳덩이들. 그 때문에 우리는 걸어서 꼬박 이틀 걸리는 거리를 단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하긴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된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하나면 어디서든 문서를 주고받으며 웬만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안방에서 은행 일을 보고, 우체국에 가지 않고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처럼 초고속화한 교통과 통신 덕분에 우리는 무협지에 나오는 축지법도 부럽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초고속 시대의 면모는 온갖 분야의 업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람의 힘으로 하루 꼬박 걸릴 복잡한 계산을 컴퓨터는 단 몇 초 만에 해결한다. 큰 토목공사장 주변은 며칠 사이에 야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서 지도가 바뀌기도 한다. 그 때문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를 탄생시킨 전설도 현실이 된다. 그밖에도 온갖 발달한 기계 덕분에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한편 속도는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다. 자동화된 공장에서는 기계 한대가 과거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대신하여 대량으로 상품을 생산한다. 더불어 문명의 속도는 뭇 생명체들의 성장도 빠르게 했다. 농업 분야에서는 비닐하우스와 다양한 성장촉진제를 활용한 속성재배가 일반화되었다. 축산 분야에서도 닭, 돼지, 소 따위 가축을 짧은 기간에 비육肥肉하여 대량으로 출시한다. 사료를 이용한 물고기 양식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생명의 시계가 빨라졌다.



초고속 시대가 낳은 모순과 우리의 자화상

속도는 사람을 편리하게 한다. 하지만 그 편리함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건아니다. 온갖 기계는 어려운 일을 대신하면서 일의 속도를 높여준다. 그로써 토지와 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윤은 증대되었다. 하지만 그 혜택이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다수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속도의 증가는 오히려한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을 늘려 놓았다. 나아가 그것은 다수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하고 정년을 앞당겼다. 그로써 대부분의 노동인구는 펄펄한 중년 나이임에도 일터에서 소외되어 불안과 방황을 겪게 되었다.
속도의 모순은 우리 일상을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우선 출근길이 바빠졌다. 여전히 정치경제 권력과 문화의 중심인 서울을 둘러싸고 수도권 전반으로 생활권이 확대된 까닭이다. 그 때문에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매일 아침 출근전쟁을 치른다. 그러다 보면 밥먹을 시간도 부족하다. 길가에 어정쩡하게 서서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속도 경쟁을 벌인다. 학생은 성적을 위해, 청년은 취업을 위해, 직장인은 성과를 위해서 속도에 집착한다. 그 때문에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날마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보와 상품도 결코 우리를 편하게 해주지 않는다. 남보다 먼저 새로운 정보에 접하고,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 이른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가 되기 위해 또 경쟁한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고, 분초를 다투어 눈에 띄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초고속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현대인에게 속도는 능력이다.
또한 속도에 대한 강박관념은 기업 활동에서 정점에 이른다. 소비자의 요구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보니, 그런 변화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에 기업의 사활이 달려 있다. 빠른 생산과 빠른 소비 사이에서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가 피로에 찌들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지를 찬찬히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초고속 시대가 낳은 모순과 우리의 자화상

냉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덕허덕 살아남기 위해서든,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때문이든, 우리는 이미 속도의 노예가 되었다. 동시에 그 속도 속에서 지쳐간다. 그 때문에 이즈막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으라는 훈계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느림과 치유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소수에 국한된다. 정작 숨가쁜 일상에 지쳐 치유가 필요한 다수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이거나, 어쩌다 맞이하는 일회용 휴식일 뿐이다. 그들에게 욕망을 버리고 느림을 택하라는 건, 달리는 고속열차에서 뛰어내리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탈출이나 자발적 낙오가 아니다. 달리는 열차 자체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승객이 아니라 기관사의 몫이어서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승객들 다수가 각자의 욕망을 조절하며, 한목소리로 감속을 요구해야 한다.

과잉된 욕망은 속도의 과잉을 불러오는 법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모두에게 원대한 꿈, 거대한 목표를 가지라고 닦달한다. 모두에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거느리고 더 많이 누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속도는 어쩌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무작정 욕망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지금껏 경제성장의 논리에 집착해왔다. 잘 살아보자는 욕망에 사로 잡혀 ‘일중독’에 빠지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오직 속도만 강조되었다. 그 때문에 휴식도 잊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그리고 결국 보상 없는 속도에 지치고 말았다. 이쯤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욕망을 키우는 건 개인의 자아나 내면이 아니라, 경쟁을 가속화하는 사회적 구조라는 것을. 더불어 개인의 욕망을 조절하려면 사회경제적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요컨대 지금은 온갖 재화와 상품이 넘쳐서 문제가 되는 시대이다. 경기침체의 원인도 그러한 과잉생산에 있다. 그처럼 충분한 사회적 생산능력에도 우리가 멀미나는 속도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나려면 전통적인 공동체 정신부터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덜 바쁘게 살아도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글. 박남일 (역사칼럼니스트) 사진. 문화재청, 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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