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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편리한 교통수단의 운행자, 인력거꾼
작성일
2023-04-2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941

편리한 교통수단의 운행자, 인력거꾼 오늘날에는 버스나 택시가 대중 교통수단이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인력거가 목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당시에 인력거 끄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인력거꾼이다.

인력거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던 수레이다. 자전거 바퀴보다 큰 두 바퀴 위에 사람이 타는 자리를 내고 포장을 씌워 만들었다. 인력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다. 일본인 하나야마가 인력거 10대를 들여와 서울 영락정(지금의 중구 저동)에 가게를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시내, 서울과 인천 사이를 운행했다.


처음에 인력거꾼은 모두 일본인이었지만 인력거가 늘어나면서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물 배달을 다니며 한강 물꾼이나 가마꾼, 농촌에서 올라온 농부들이 인력거꾼이 되었다. 인력거꾼은 승객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인력거 삯으로 받은 돈을 인력거 업주와 5 대 5로 나누어야 했기에 인력거꾼 손에 쥐는 돈이 별로 없었고,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비싼 인력거를 도둑맞는 날에는 인력거 값을 물어 주느라 거리로 나앉기도 했다.


초기에는 인력거를 이용하는 승객이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한국인들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인력거는 조선의 고위 관리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가마를 버리고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고위 관리를 경호하는 순검은 인력거가 빨리 달리면 같이 뛰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인력거는 왕진을 가는 의사도 자주 이용했는데, 의사가 왕진을 가면 환자의 집에서 인력거 삯을 지불했다. 또한 기생들도 단골로 이용했으며, 기차 승객들도 많이 이용했다. 인력거꾼들이 지리에 밝기 때문에 기차 승객들이 인력거를 타면 목적지까지 쉽게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력거꾼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천한 직업과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3천여명의 인력거꾼들이 모여 자녀들이 다닐 학교를 세웠으니 바로 대동학원이다. 이들은 애국심도 강하여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소비조합을 만들어 1925년 한반도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 때나 1929년 경상도 지방의 대기근 때는 재난을 당한 이웃들을 돕기도 했다.


자동차가 도입되기 전에는 인력거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1911년 말 전국의 인력거가 1,217대였는데, 자동차는 겨우 2대뿐이었다. 그 뒤에도 인력거는 점점 늘어나 1923년에는 4,647대나 되었으며, 서울에서만 1,816대가 운행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버스와 택시가 대중 교통수단이 되면서 인력거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31년에 자동차가 4,331대로 늘어난 반면, 인력거는 2,631대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점점 자동차와의 경쟁에 밀려 8·15 광복 후에는 서울에서 인력거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인력거꾼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나와 있듯이 사회적 지위도 낮고 수입도 적어 하층민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적절한 교통수단이나 도로 기반이 갖춰지지 않던 시대에 중산층에게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의 운행자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 1920년대 중반 택시 영업이 시작되면서 인력거꾼은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조선일보》 1927년 3월 6일자에는 “최근 경성 시내 각처에 값싸고 빠른 택시가 등장하여 성업 중이다. 그에 따라 제일 타격을 받는 것은 시내에 흩어져 있는 수천 명 인력거꾼이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인력거꾼들은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928년에는 버스 운행도 시작되어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글. 신현배(역사 칼럼니스트, 아동문학가) 일러스트. 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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