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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加髢), 조선 여성들의 필수 아이템!
작성일
2021-08-31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903

가체(加髢), 조선 여성들의 필수 아이템! 가체(加髰)는 그 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수식(首飾)이다. 조선 후기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때 가발을 만들어 머리에 둘렀다”라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실록』에는 고려 때 몽골에서 넘어온 풍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하간 우리가 머리에 신경 쓴 것은 정말 오래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01.신윤복 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화려함의 절정, 가체

1502년 1월 14일.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다. 그는 보염서(補艶署)를 설치해 의류와 메이크업 그리고 화장품 등을 전담하도록 할 만큼 왕실 여성들의 패션에 집착한 군주였다.


“공주의 혼례에 가체(加髢) 150개를 써야 할 것 같소. 그러니 각 고을에서는 반드시 2월 그믐날까지 이를 바치게 하라!”

- 『연산군일기』 1502년 1월 14일 기록


그는 사랑하는 공주의 혼례식에 사용하기 위해 가체를 150개나 주문했다. 추상같은 왕명이었으니 그대로 실행되었을 것이다. 높이 20~30㎝, 뭉게구름 모양의 윤기나는 가체를 올린 여성 150여 명이 혼례식장에 가득 모여 있는 장면. 쉽게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18세기에 그려진 〈미인도〉를 비롯한 신윤복의 풍속화 속에서 풍성한 가체를 얹은 여성들을 떠올려 보면 그 이미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다. 조선 여성들은 화려했다. 뛰어난 염색 기술을 동원해 명나라에서도 감탄했던 화려한 색감의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매분구(賣粉嫗) 혹은 상설 매장인 분전(粉廛)에서 화장품을 사 하얗고 뽀얀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려한 비녀와 함께 머리 위에는 풍성한 가체를 얹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체를 만들 머리카락이 부족했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중에 가장 강력한 이념은 효(孝)였다. 귀를 뚫는 것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모두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었고 불효로 인식하는 시대였다. 인조모발도 없던 조선시대에 가체를 제작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스님과 비구니 등 출가하는 남녀의 머리카락이다. 그다음은 바로 죄수들의 머리카락이다. 그 밖에 의외의 상황에서 머리카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로 남성들이 상투를 틀기 시작할 때이다. 상투를 맵시 있게 틀기 위해서는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깎아야만 했다. 남성의 헤어스타일 완성을 위해 자른 머리카락이 여성의 헤어스타일 완성을 위해 쓰이게 된 것이다.


02.순정효황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03,04.가체는 장식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최고의 기술 지녔던 가체장

다양한 사람에게서 확보한 머리카락은 색깔과 굵기, 모질(직모, 곱슬머리 등)이 너무도 다양했고 차이가 심했다. 이를 균질하도록 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만들고, 그 안에 다양하게 수집한 머리카락을 담갔다. 씻고 탈색한 후 곱게 펴 염색을 준비했다. 검은색으로 균질하게 칠한 후 짧은 머리카락은 촛농으로 붙였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정밀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기초 작업을 마무리하고 가지런하게 빗은 다음, 머리 타래를 만들고 윤기나는 광택을 입히면 가체 머리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용도에 맞게 모양을 만들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가체장의 미감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가체를 제작했던 이들은 조선시대의 헤어디자이너였던 셈이다.


가체는 그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려면 뛰어난 기술도 필요했다. 그런데도 수요는 넘쳐났다. 높이와 크기에 더해 각종 장신구로 아름다움을 과시하게 되면서 가체는 점점 더 풍성해지고 커졌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웅황(雄黃)으로 만든 판(版)과 법랑(法琅)으로 만든 비녀·진주 장식 등으로 꾸며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라고 가체를 설명했다. 또한 그가 남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당시 어느 부자집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급하게 일어서다가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나이는 고작 13세였다. 이처럼 커지고 화려해진 가체는 장신구를 포함한 가격이 무려 7만~8만 전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만 전이면 곧 700냥이란 말이다. 18세기 후반 서울에서 11칸 초가집이 110냥이었다고 하니 가체 하나의 가격이 비쌀 경우 초가집 6~7채에 해당한 셈이다. 실로 엄청난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05.드라마 <마이 프린세스> 스틸컷 ©MBC 06.신윤복 필 《여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07.『가체신금사목』 1788년 여인들의 가체를 금할 것을 규정한 법제서다. ©국립민속박물관 08.보물 정조 어찰첩 중 하권 7~8면. 박준원에게 보낸 편지로 마지막 부분에 ‘가체의 금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국립고궁박물관

사치품이지만 유통은 활발

가체는 주로 체괄전(髢髺廛)에서 판매되었다. 이는 다양한 가체를 구비한 상설 전문 매장이었다. 여쾌(女儈)로 불렸던 중매쟁이나 수모(首母)들이 직접 들고 다니며 방문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고가품이라 대여해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혼례를 주관했던 수모는 신부를 위해 머리 타래를 틀고 비녀를 꽃아 머리 모양을 완성하기도 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가체를 대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욕망에 더해 집안의 가장들이 이러한 가체머리 사용을 금지하지 않아 유통이 활발했으며, 그 결과 가체는 사회적 문제 즉, 사치풍조의 원흉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가체는 검소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치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영조대에서 규제가 시작되었다.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행하고 부인들이 한 번 가체를 마련하는 데 몇 백 금을 쓰며, 갈수록 서로 자랑하며 높고 큰 가체를 숭상하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러한 현상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던 영조는 1756년 1월 16일,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대신 사용하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체의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영조 자신도 본인이 가체금지령을 내린 지 3년이 지난 1759년 정순왕후와 혼례를 치르면서 가체를 제작해 사용했다. 결국 가체를 금지한 후 52년이 지난 1788년 정조가 “부녀자의 복식은 정치와 무관한 것이라 말하지 말라!” 하며 그 유명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정해 다시 한번 가체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실로 강력한 조치였다.


막을 수 없는 머리 꾸미기의 진화

1788년 정조의 가체금지령 이후 실제로 가체 사용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글쎄, 다소 줄어든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1794년 정조는 가체금지령 시행의 중간 점검을 한다.


“…… 가체를 금지한 것은 또한 요즘 어떠한가?”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었다.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점 높고 커지고있으니 엄하게 법조문을 세워 정해진 규격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2월 19일 경오 8번째 기사


강력한 규제로 분명 과하고 사치스러웠던 가체의 유행은 어느 정도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여성들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급격한 헤어스타일 유행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1790년대 여성들은 더는 풍성한 가체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뒷머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가체와 같은 소품을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뒷머리를 활용해 크게 타래를 틀고 점점 높게 올렸던 것이다. 보수적인 남성 지식인들은 이 마저도 눈에 거슬렸던지 규제할 것을 제안했지만 정조는 자율적 규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관료들이 먼저 각자의 집안에서 솔선수범한다면 모든 백성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하며 이 논의를 마무리했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성의 복식이자 여성 패션과 정치의 결합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시대부터 여성들은 머리 장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가체는 우리 역사의 전 시대에 걸쳐 여성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던 소품의 정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고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통제되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머리 모양을 향한 여성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가체에 대한 다양한 담론은 욕망을 단일한 규제로만 제어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글. 강문종(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조선잡사』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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