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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춘향전의 최고 수혜자 남원 ‘광한루’
작성자
이원호 연구사
게재일
2017-07-13
주관부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조회수
2172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에 견줄만한 우리 것은 단연코 ‘춘향전’이다. 조선후기 작자미상의 판소리와 소설로 전래되면서 근대시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소설 말미에 과거급제 사실을 속인 채 춘향이를 구해내는 극적 반전과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그네 등 소설 속 무대가 되었던 곳들도 제법 인기를 끄는 데 한몫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황희 정승(1363~1452)이 남원으로 유배오면서 건립된 광통루(廣通樓)가 광한루원(廣寒樓苑)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후 전라감사 정철과 남원부사 장의국이 부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하였는데, 요천강을 끌어 호수를 파고 삼신산과 오작교를 조성함으로서 정원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1444년에는 남원부사 유지례에 의해 당시 황무지였던 광한루 경계 밖 서남쪽에 밤나무숲도 조성되었다.


  오늘날 ‘광한루원’은 명승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광한루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정말 이도령은 춘향이가 광한루에서 그네타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지 월매집이었던 곳은 어디일지 한번쯤은 상상해 봄 직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지금의 ‘광한루’가 남아있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광한루 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한 ‘춘향전(春香傳)’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이다.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명승팀은 광한루원 주변의 경관 변화과정과 그 요인을 시대별 지적도를 통해 추적한 바 있다. ‘광한루원’이 지금의 영역을 가지게 된 것은 1930년대 주거밀집지역에 둘러싸여 퇴락했던 ‘광한루’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춘향의 정렬을 기념하기 위해 광한루를 개축 시공한다는 신문기사(1934.9.11.동아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한루를 그저 춘향전 이야기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아닌 춘향전의 장소성을 가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광한루 공사자금을 마련하는 데는 남원 유지들의 기부 외에도 최봉선을 위시한 기생들이 모금한 성금 이천원을 선뜻 내놓는 일도 있었다. 이후로 광한루 지역은 누각 인근의 민가와 시장, 학교부지 등을 지속적으로 편입시키면서 조선시대 역사경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건물이 보수되고 정원공간도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문화재들은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따라 남겨지거나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조선시대 역사적 건물인 ‘광한루’가 오히려 이를 통해 파생된 ‘춘향전’이라는 대중적 인기현상에 힘입어 주변 경관까지 올곧이 보존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문화재를 지키는 힘은 곧 “유산의 가치인식에 대한 저변 확대”라는 것에 출발점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설명사진


<광한루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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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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