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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기고

제목
발굴로 드러난 조선시대 교도소 '경주옥사(慶州獄舍)'
작성자
이은석 연구관
게재일
2016-06-30
주관부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회수
2474

 


  최근 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 죄수를 구금하던 교도소)를 주제로 한 사극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뇌옥(牢獄), 영어(囹圄) 또는 형옥(刑獄) 등이라 하였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은 없고 문헌으로만 남아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97년에 경주읍성 내에 자리했던 조선시대 옥사(獄舍) 유적을 발굴하였다. 이 옥사는 19세기 이전에 그려진 <경주읍내전도(慶州邑內全圖)>에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둥근 담장을 둘린 원옥(圓獄) 형태로 그 내부에 2동의 건물과 앞쪽으로 관헌건물이 존재하였다. 발굴 결과 둥근 돌담장 내부에 동서 2동의 건물터와 감시초소, 좁은 문과 관헌건물터, 돌담장 바깥으로는 너비 4∼5m에 이르는 수구가 있어 쉽사리 탈옥을 할 수 없는 구조로 그림보다 상세한 모습이 드러났다.


 


  문헌에 의하면 세종 때 경주옥사의 표준설계도(1426)인 안옥도를 만들고 배포하였다. 특히 남녀 옥을 구분하였고, 교시를 내려 여름옥과 겨울옥을 두어 수형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 특색이다. 실제로 발굴된 동쪽 건물터가 크고 서쪽이 작아 음양배치에 따른 남녀 옥의 구분이 가능하였다. 다만 여름과 겨울을 구분할 수 있는 건물구조가 확인되지 않아 여름에는 흙벽을 허물어 시원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서양에서 남녀감옥의 분리는 1595년 네덜란드에서 처음 실시되었다고 하니 경주옥사의 문헌과 발굴결과를 토대로 볼 때 조선이 170여년 앞선 것이다.
 
  한편 경주옥사는 19세기 천주교 탄압으로 수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허인백 등 세 명이 경주에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지켰다고 전한다. 이들은 모두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시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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