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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역사도 좋아서 하는 일 - 최선일 문화재감정위원
작성일
2018-01-08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2162

영화도, 역사도 좋아서 하는 일 - 최선일 문화재감정위원 그에게 불상은 그저 좋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부처님이 좋아 이유 없이 사진을 모으곤 했다던 최선일 박사. 불상에 대한 애정은 불교미술사 연구로까지
이어졌다. 불상을 좋아하다 보니 불상을 빚은 조각승이 궁금해졌고, 어느 덧 조각승의 계보를 밝히는 일이 그의 주된 연구과제가 됐다. 최 박사가 처음 학계에알린 조각승은 ‘색난’이라는 스님이었다. 색난 스님의 작품을 좇아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에 갔을 때, 최 박사는 운명처럼 정조문 선생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재일교포로서 타국 땅에 한국문화재박물관을 세운 정조문 선생. 그가 마지막까지 고려미술관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최선일 박사에 의해 영화로 탄생 했다. 모두 최 박사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타향살이의 그리움을 문화재 수집으로

일제가 한국을 점령한 시기, 6살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간 소년이 있었다. 일본 교토에 처음으로 한국문화재박물관을 만든 고(故) 정조문(1918~1989) 선생이었다.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조국에서의 가난을 견디다 못해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에 터를 잡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3년 남짓의 초등교육이 전부였고, 삼십대가 될 때까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정조문 선생은 신문배달, 막노동 등 온갖 고생을 해야 했다. 자수성가의 꿈을 이룬 건 성인오락실인 파친코 사업 덕분이었다. 33살의 나이에 시작한 파친코 사업은 날로 번창해 일본 사회에서도 제법 인정받는 사업가가 됐다. 이후 그는 교토대학 교수, 소설가, 사학가 등 일본의 지식인과 활발히 어울리며 일본 내에서 영향력을 떨쳐나갔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그 열망을 문화재 수집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일본 교토에 세워진 고려미술관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세계 대형 박물관에도 ‘한국실’은 있다. 하지만 고려미술관처럼 해외에 한국 문화재만을 단독으로 전시한 미술관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고려미술관이 가치 있는 이유이다.

01.『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 한국미술품을 수집했던 정조문의 삶과 그가 건립한 고려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02.고(故)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 인터뷰. 우에다 교수는 정조문 선생의 살아생전 모습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정조문의 항아리 추진위원회 03,04.정조문 선생이 설립한 고려미술관에는 백자호(18세기)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계통적으로 모은 도자기류를 비롯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고려미술관 05.영화 <정조문의 항아리>를 제작한 황철민 감독(세종대 영화예술과 교수),최광희 작가와 함께 ⓒ최재용

정조문 선생과 최선일 박사의 인연

“정조문 선생은 경계인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죠.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한국인은 피지배인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 내에 한국 미술관을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실현시킨 것은 오로지 정조문 선생의 힘이었어요.”

최선일 박사는 처음으로 정조문 선생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위원이자 불교미술사학자인 최 박사는 연구를 위해 2001년 고려미술관에 방문했다가 정조문 선생을 처음 알게됐다. 그리고 그 인연은 정조문 선생의 일생을 담은 영화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2001년 이후에도 최박사는 연구를 목적으로 수차례 고려미술관을 다녀갔고, 그때마다 고려미술관은 한국에서 온 연구자에게 호의적이었다. 연구자로서 많은 도움을 받은 최 박사는 미술관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졌고, 때마침 2층의 오래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1988년 고려미술관을 개관할 당시 찍은 정조문 선생의 영상. 너무 오래돼서 화질이 엉망인 것을 보고 이 영상을 새로 제 작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2013년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조문 선생에 대한 존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감독은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황철민 교수가, 작가는 최광희 영화평론가가 맡았다. 그 외에 음악부터 팸플릿 제작까지 모든 과정이 재능기부로 이루어졌다. 제작비 또한 한국인과 일본인 350여 명의 후원으로 마련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후원을 받은 이유는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정조문 선생의 삶에 대한 상징적 의미이기도 했다. 영화는 철저히 정조문 선생의 일생을 조명했다. 그가 남긴 영상과 함께 거의 살아생전 그를 알았던 지인의 증언이 주를 이룬다. 이를 통해 정조문이 품었던 조국애는 무엇이었는지, 재일교포였던 그가 지키고자 했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집한 문화재를 소개하거나 가치를 논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정조문의 항아리>가 여느 영화와는 다른 점이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 불친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감독과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에 온 열정을 쏟아부은 한 실향민의 이야기,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삶을 통해 무엇을 느낄 것인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었다.

“최근에 정조문 선생의 얼마 남지 않은 지인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셨어요. 저보다 10년만 앞섰더라도 정말 정조문 선생과 친한 벗들의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더 늦기 전에 우리라도 영화에 담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조금만 늦었더라도 정조문 선생의 삶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영화 제작 당시 일본 추진위원장이자 고려미술관 관장이었던 고(故)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는 안타깝게도 2016년 세상을 떠났다. 우에다 교수는 정조문 선생의 살아생전 모습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많은 일본인이 따랐던 정조문 선생

정조문 선생은 우에다 교수를 비롯해 재일 작가 김달수, 재일 사학자 이진희,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 등 전공을 불문한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들은 정조문 선생과 어울리며 ‘놀듯이’ 조선 문화를 답사하러 다니곤 했다. 실제로 정조문 선생이 남긴 홈비디오 영상에는 교토 최고의 지성인들이 신나게 어깨춤을 추며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못해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일본인과 문화재답사팀을 꾸려 이곳저곳을 답사하러 다니는 모습도 있다. 어떻게 파친코주인과 일본의 최상위층이 어울릴 수 있었을까.

“정조문 선생의 장례식에 4천여 명이 왔어요. NHK 방송사에서 고려미술관 개관식을 담기도 했죠. 그만큼 교토 내에서 인정받았던 사람인 거예요. 저는 그를 단순히 파친코 주인, 고려미술관을 세운 사람 정도로 인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 문화재를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어울리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니까요.”

정조문 선생은 단순한 문화재 수집가가 아니었다. 그의 벗들에게 한국의 문화가 일본 고대사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문을 통해 일본인들은 일본 속의 한국을 이해했고, 일본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지금은 정조문 선생이 세상에 없지만, 고려미술관이 일본 땅에 남아 있는 한 고려미술관은 정조문 선생처럼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고려미술관은 ‘주막’ 같은 곳

연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정조문 선생을 존경한 최선일 박사의 꿈을 물었다. 최 박사는 고려미술관을 ‘주막’이라 표현하며 입을 열었다. “그곳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모여 책도 보고, 연구도 하다가 6시가 되면 밖으로 나가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 <정조문의 항아리>를 극장 상영하는 것도 제게 남은 사명이고요. 교토에 가신다면 고려미술관에 들러 운영난에 시달리는 정조문 선생의 가족들에게 ‘고생한다, 응원한다’ 한마디 남겨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정조문 선생의 수집은 하나의 백자 항아리에서 시작했다. 우연히 골동품 가게를 지나다 집 한 채의 값만큼 비싸게 값이 매겨진 조선의 항아리를 보고 매료된 것이 1,700여 점의 수집으로 이어졌다. 그 문화재들이 하나씩 모이기까지, 1,700여 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셈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숱한 문화재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마치 주막에 사람들이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듯 말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최선일 박사도 주막안에 있는 듯했다. 정조문 선생에 대해 묻자 설레어하며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풀어놓았던 최 박사. 그의 모습에서 정조문 선생의 얼이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조문 선생과 최선일 박사,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한 민족이니 말이다.

 

글‧이혜민 사진‧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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