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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궁 안팎을 가르는 경계, 금천교
작성일
2023-02-27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523

궁 안팎을 가르는 경계, 금천교 01.경복궁 영제교 ©서헌강

왕이 머무르는 신성한 공간의 상징적 경계, 금천

조선 궁궐에는 정문을 들어와 그다음 문을 향하는 중간 마당에 물길이 있다. 이 물길은 나쁜 귀신이 건너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주술적인 뜻으로 금천(禁川)이라 불렸으나 풍수적으로는 배산임수를 구현하는 명당수(明堂水)였고, 기능적으로는 궁궐 내 배수로였다. 또한 금천은 왕이 머무르는 신성한 공간의 상징적 경계였다. 금천을 건너는 다리는 금천교로, 궁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복궁 금천과 돌다리는 1395년 경복궁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있었으나, 금천에 물을 끌어들인 것은 태종 11년(1411)이고, 돌다리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세종 8년(1426)이다. 영제교는 금천교(錦川橋)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경복궁은 빈터로 남아 있었지만 유득공이 1770년 봄 이덕무, 박지원과 경복궁 옛터 등 한양도성 곳곳을 돌아보고 쓴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따르면 영제교 동서쪽 금천 석축 위에 천록(天祿) 등의 서수 조각이 있었다. 영제교 주변의 서수상들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영제교 서수 등이 조선총독부 건립 과정에서 해체된 채 놓인 모습이 찍힌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사진이 남아 있는데, 영제교와 서수들은 경복궁 훼철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2001년 흥례문 권역이 복원되면서 제자리를 찾았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는 태종 11년(1411) 건립되었다. 교각은 두개의 무지개 아치(홍예) 모양이고, 홍예 사이에 도깨비 얼굴을 조각하고, 다리 아래에는 해치(獬豸)와 거북 조각상이 있으며, 난간에는 연잎 조각과 동물상 등을 새긴 아름다운 다리이다. 창경궁에는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창경궁 창건 중인 성종 14년(1483) 건립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희궁(경덕궁)과 덕수궁(경운궁)에도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의 원래 자리는 현재 구세군회관인데, 외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로막혔다.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경희궁 금천교는 일부 남은 옛 부재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1907)에 따르면 덕수궁 금천교는 1904년 대화재 이후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1906년 새로만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자동차가 드나들기 위해 금천이 메워지며 없어졌다가 1986년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02.경복궁 영제교 석수 유리건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03.창덕궁 금천교 ©서헌강

궁궐 사람들의 마중과 배웅, 기다림의 장소

금천교는 궁궐의 상징적, 의례적 경계 역할을 했다. 궁궐의 물리적 경계는 궁장이며 궁장의 사방에 위치한 궐문이 그 통로이지만,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의식공간이자 업무공간으로서 궁궐의 경계는 금천교였다. 금천교가 궁궐의 안팎을 가르는 실질적 경계였음은 조선조 승정원의 업무지침서인 『은대조례』에 기록된 승지의 근무 규정에서 알 수 있다. “승지가 연속 입직하도록 규정된 일수를 마치기 전에 금천교를 넘어가면 그동안 연속 입직한 일수는 무효로 처리한다.” 즉, 금천교를 넘어가면 궐을 나간 것으로 치는 것이다.


금천교는 마중과 배웅의 장소였다. 임금이 대비와 같은 왕실 어른, 중국에서 온 사신 등을 마중하거나 전송할 때 금천교까지 나아갔다. 또한 임금이 궁궐 밖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보내는 장소가 금천교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외조부모, 장인장모나 아끼던 신하가 세상을 떠났을 때 금천교에서 거애(擧哀)하였다거나 망곡례(望哭禮)를 했다는 기사가 많다. 거애는 부음을 듣고 슬픔을 표하는 절차이고 망곡례는 시신 있는 곳을 향해 곡하는 절차이다.


금천교는 궁 밖으로 거둥하는 임금을 전송하고 마중하는 곳이기도 했다. 채제공은 정조의 어가를 금천교에서 전송하며 느낀 심회를 여러 번 기록하였다. 정조는 선왕들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에 친제하러 가던 길에 창덕궁 금천교 앞에 어가를 멈추고 체제공을 불러들인 일도 있는데, 그 일에 감격한 체제공은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다.


별빛처럼 빛나는 어필 새긴 아패를 / 牙鐫御押爛昭回
정오 무렵 대궐로 받들어 반납한 뒤 / 擎納天門午景催
들려오는 전갈이, 금천교 윗길에서 / 傳道禁川橋上路
임금 행차 소신을 기다리고 있다네 / 鑾輿留待小臣來

근엄한 시위대로 뒤뚝이며 나아가니 / 病脚蹌蹌羽衛傍
봄빛 같은 용안이 돌아보며 웃으셨네 / 天顔顧笑藹春光
하룻밤 규장각의 청릉으로 직숙하니 / 奎章一夜靑綾直
미천한 몸 위하는 임금 생각 깊은지고 / 尙爲微躬睿念長 (후략)


1640년 심양에서 청의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을 때 궐내에서 입직하는 관원들은 세자를 금천교에서 맞이하였다. 1762년 임오화변의 발단이 되었던 나경언의 고변 사건 때 영조는 경희궁에서 나경언을 친국하였다. 당시 창경궁 시민당에 있던 사도세자는 한밤중에 경희궁으로 달려가 영조에게 죄를 빌며 나경언과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가 들어주지 않자 물러나와 경희궁 금천교, 궁궐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 위에서 밤새 석고대죄하였다.


궁궐에서 숙직하는 관원들은 정월대보름 답교놀이를 금천교에서 했다. 답교놀이는 일 년간 재액을 없애고 다리에 병이 나지 않도록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 위를 오가며 다리를 밟는 풍습이다. 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기록된 「춘명일사(春明逸史)」에서 헌종 10년(1844) 정월대보름 밤 동료들과 금천교를 밟은 일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영조 때 금천교에서 답교놀이를 하고 ‘사모답교(紗帽踏橋)’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던 실록청 낭청들과 자신을 견주며 벼슬살이의 회한을 토로했다.


우리가 귀한 손님을 맞아들일 때, 보내기 안타까운 이를 배웅할 때,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 대문까지 나가는 것처럼 궁궐에서는 금천교가 그런 곳이었다. 궁궐이 직장인 관원들에게는 금천교가 출퇴근을 찍는 관문이었고, 숙직 서느라 궁 밖을 나가지 못하는 정월대보름 밤엔 관복 차림으로 수표교 대신 금천교를 밟았다. 고궁에 입장하면 반드시 건너게 되는 금천교를 지나면서 그 다리에 쌓인 마음들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글. 이홍주(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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